출처 중앙일보
해상왕 장보고 <7> 장보고의 꿈, 그리고 좌절
[중앙일보 김시래.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 장보고의 청해진 본진이었던 장도(將島). 이곳 정상 부근에 조그만 사당이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장도의 배후 마을인 전남 완도군 장좌리 주민들이 와서 당제를 지내던 곳이다. 당제란 마을을 지켜 주는 신인 ‘동신(洞神)’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다.사당 문을 열고 보니 장보고의 영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초라한 사당에도 고국에서 ‘모반을 일으킨 반역자’로 평가받은 장보고의 사연이 숨어 있었다.
이주승 완도군청 학예사는 “원래 이 사당에는 장보고를 모시지 않고 그의 밑에서 일했던 정년(고향 후배로서 당나라에 갈 때도 함께 가 군에 들어간 인물)을 제사 지냈다”고 했다. 이후 학계를 중심으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던 1982년부터 영정을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는 이어 “고려 말 이곳 장도에 1년간 머무르며 몽고에 항전했던 삼별초 장수 ‘송징’과 완도에서 불교를 키운 혜일 스님을 위한 제사는 있었지만 장보고는 안 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왜 장좌리 사람들이 처음에는 마을 수호신 격인 장보고를 외면했을까. 이 학예사는 “장보고는 역적으로 몰려 죽은데다 그 시신도 못 찾았다”며 “주민들은 이런 이유로 장보고를 주신으로 모시는 당제를 지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보고는 옛 청해진 땅에서조차 1000년 넘게 정치적·역사적 이유로 잊혀진 인물이었다.
◆옛 부하의 칼에=841년 11월 어느 날. 비명 소리가 청해진의 밤을 갈랐다. 장보고가 총애하고 믿었던 옛 부하 염장의 칼에 쓰러졌다. 염장은 장보고가 838년 12월 김우징(839년 정월 신무왕으로 즉위)을 도와 민애왕을 물리칠 때 일으켰던 군사(동평군)의 장수를 맡았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염장이 거짓 투항해 온 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 싸움 한 번 못한, 허망한 죽음이었다. 더구나 그는 오랜 세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직접적인 이유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장보고를 반역자로 다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왕이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맞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청해진에서 모반했다’고 돼 있다. 『삼국유사』도 ‘왕의 약속 위반을 원망해 난을 꾀하고자 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때 처음 의문 제기=일부 학자는 장보고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사서인 『동국통감』은 누명을 씌운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장보고가 모반했다는 말만 있고 모반한 실상이 없으니, 그의 공을 시기하고 이익을 탐내는 무리가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들어서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하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장보고가 모반을 해 얻을 실익이 없다는 얘기도 설득력이 있다.
모반 당시 신라 문성왕은 장보고가 위험을 무릅쓰고 즉위시켰던 신무왕의 아들이다. 장보고로서는 그가 최대 후원자였다. 문성왕 2년(840)까지만 해도 장보고가 일본에 회역사를 보내고 견당매물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정사에 남아 있어 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견제와 음모설=학계에서는 지방 출신 장보고가 중앙 정부의 실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의 조직적인 음모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동국대 이승영(국제통상·전 한국무역학회장) 교수는 “장보고가 왕권을 좌우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견제하던 귀족들의 세력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귀족들이 장보고를 제거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성장으로 인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장보고의 정치적 영향력과 무력은 대단했다. 청해진을 세울 때 1만 명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흥덕왕에게서 받은 장보고는 해상 무역을 방해하던 해적 세력을 단기간에 제압한다. 838년 겨울에는 김우징의 쿠데타를 도우면서 무력을 과시했다. 당시 기득권층이던 귀족들로서는 두려워할 만했다.
장보고가 가진 해상 무역권과 막대한 부를 탐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장보고를 제거한 염장은 842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장보고의 일본 회역사 이충·양원이 싣고 온 물품을 되돌려 받으려 했다.
서울교대 김호성(윤리교육학·전 총장) 교수는 “장보고와 중국·일본측의 신뢰관계에 기초한 청해진 운영을 다른 세력이 쉽게 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이후 청해진은 예전의 활발한 활동상을 잃었고 그나마 851년 2월 완전히 해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장보고가 숨진 장소는 염장을 맞이하는 연회가 열린 곳. 당시 청해진의 본진과 무역관 등 주요 시설이 밀집해 있던 장좌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청해진의 군사본부가 있던 장도와 그 뒤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거둔 셈이다.
장보고, 닻 내리는 곳마다 절 지었다
법화사상에 영향받은 듯
국내 선종 전파에 큰 역할
장보고는 불교의 후원자였다. 동시에 불교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장보고는 돈을 벌자 중국 산둥(山東)성 츠산의 법화원을 설립했다. 법화원은 당시 산둥반도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전남 완도의 상왕봉 아래에도 법화사를 만들었다. 제주도 하원동에 있는 법화사도 장보고가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법화사 주지를 지낸 시몽 스님은 『장보고의 법화사상과 관음신앙』 논문에서 “장보고는 법화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 선단은 닻을 내리는 곳에 법화사를 창건했다”고 밝혔다.
장보고가 법화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법화사상의 중심은 관음신앙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보고 어루만져 준다고 한다. 특히 뱃사람에게는 파도를 진정시켜 항해 안전을 지켜 주는 자비의 보살로 평가받는다. 새로 세워진 츠산 법화원에는 지금도 높이 25.8m, 무게 200여t에 달하는 거대한 청동 관음상이 있다.
장보고는 신라 승려의 당나라 유학과 귀국 지원을 했다. 일본 승려인 엔닌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천태종의 3대 좌주(교단의 수장)다. 국내 구산선문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구산선문은 9~10세기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을 퍼뜨리면서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승려 집단이다. 숭실대 김문경(역사학) 명예교수는 “장보고는 국내 선종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쌍계사와 보림사, 대흥사, 백령사 등 9개 선문이 모두 장보고와 관련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 ▶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 ▶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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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이나 이간질 정치하는 인간이 꼭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