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지정번호: 전북기념물 제 16호
지정년도: 1974년 9월 24일
소 유: 국유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3
시 대: 조선시대
면 적: 23,267.7 제곱미터
오목대는 1380년(고려;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그 옆에는 1900년(조선;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고 한다.
오목대 뒷편으로 돌아가면 육교가 있는데, 그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황산대첩]
황산대첩 개관
전황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몽고·홍건적·왜구 등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는데, 그 중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다.
특히 왜구의 침탈(侵奪)로 고민하던 고려 말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 국운을 보전해야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왜구는 진포에서 원수 나세와 최무선의 화포로 격파 당한 왜선 500여 척의 패잔병들이었다.
해상 퇴로를 잃은 왜구 잔여세력은 소백산 줄기를 따라 남하하다가, 우왕 6년(1380) 8월 함양의 사근내 역(수동)에 진을 쳤다.
이 때 도원수 배극렴(裵克濂)이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왜구를 공격하였으나
박수경·배언 등 장수 2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처럼 왜구의 규모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승세를 탄 왜구는 다시 남원성을 공격하다 물러가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장차 광주 땅의 금성산성(담양)에서 말을 먹인 뒤 곧 북상하리라.」는 소문을 냈다. 이에 나라가 크게 긴장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북방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태조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로 삼아 부장으로 하게 하고,
평리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 도길부(都吉敷)·지문하 박임종(朴林宗)·상의 홍인계(洪仁桂)·밀직 임성미(林成味)·척산군 이원계(李元桂)를
원수로 삼아 왜구 섬멸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왜구는 칼과 창·활 등으로 무장하고 약탈한 말을 사용하였다. 전술로는 인월역을 중심으로 황산천(荒山川)을 주둔지의 해자(垓字)로 이용하면서
제2차 방어선으로 활용하고, 500여 미터 전방의 동무 마을과 서무 마을의 양쪽 산등성이에 왜구를 매복시켜 최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남원에 주둔하던 태조는 승전을 기원하는 출전 제례를 올린 후 운봉 황산을 향하여 나아가 사창리 마을 앞 해발 531m의 정산(鼎山) 봉우리에 올랐다.
그리고 일단 동무듬과 서무듬 사이의 매복 방어선을 돌파하여 인월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주력을 단숨에 격파하고자 하였다.
먼저 여러 장수들이 정산봉 좌측 동무듬 평탄한 쪽을 공격하자, 대비하고 있던 적의 예리한 반격에 쫓겨 번번이 퇴각하였다.
이러한 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하루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작전을 바꾸어 우측 험한 길을 택하여 서무듬 산등성이에 매복하고 있는 적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과연 태조가 전진하자 매복하고 있던 적의 군사가 대거 튀어나왔다.
태조는 의연하게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적의 얼굴에 명중시키니 모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는 중에도 왜구들은 몇 번이고 집요하게 기습을 시도하였다. 드디어 황산천의 진흙탕 속에서 아군과 적을 구별할 수 없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3 차례에 걸친 적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뒤범벅이 되어 끝내 일어서는 자는 정작 모두 고려 군사들뿐이라고 사료는 기록하고 있다.
싸움에 밀린 왜구들은 황산 동쪽 기슭 험준한 산 위에 굳게 웅거하고 지키며 대적하였다. 태조는 군사를 요해처(要害處)에 나누어 지키게 하고,
휘하 이대중 등 10여 명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올려쳤으나 결국 사력을 다해 반격하는 적에게 쫓겨 내려오고 말았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인지라 태조는 다시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 나팔을 불어 총 돌격을 명하였다.
군사들은 개미떼처럼 산을 기어올라 적진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적의 장수 하나가 창을 겨눈 채 장군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위급하였다. 이를 본 편장 이두란이 큰소리로 태조를 부르며 말을 달렸다.
"영공(令公)은 뒤를 보시오. 영공은 뒤를 보시오."
거듭 소리치며 달렸으나 장군은 미쳐 손을 쓸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의 화살이 먼저 바람을 가르고 날랐다.
화살은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꿰뚫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태조는 의연히 싸움에 임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바꿔 타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적이 쏜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에 꽂히자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급하게 적을 쳐 나아갔다. 군사들은 태조가 부상한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싸움은 급박하였다.
태조가 화살을 맞고 부상하자 적이 몰려와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나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며 그 자리에서 적 8명을 베어 죽이니 감히 적이 달려들지 못하였다.
휘하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었으나 싸움의 승패는 가늠할 수 없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태조는 하늘을 향해 소리쳐 맹세했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크게 감동하고 용기 백배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적의 사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적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적의 대장은 백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날래기가 어느 장수와 비할 수가 없었다. 적의 대장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 하였다.
<아지>란 어리다는 뜻이고 <발도>란 몽고말로 용감하다는 뜻이다. 태조는 적장 아지발도의 용맹을 아껴서 생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두란이 말하기를 생포하려면 많은 우리 군사가 희생될 것이라 하여 만류하였다.
아지발도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활을 쏠만한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조는 말하였다.「내가 활로 투구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저자의 목을 쏘아라.」라고 말하며 박차를 가해 말을 몰았다.
이윽고 활을 들어 투구 꼭지를 쏘니 투구 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자 아지발도는 황급히 투구를 고쳐 쓰려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두 번 째 활을 쏘아 투구 끈을 맞히니 투구는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두란이 활을 당겨 적장의 목을 쏘았다.
적장이 죽었다. 적이 통곡하며 우는소리가 계곡을 진동하니 마치 만(萬)마리의 소가 울부짖는 것과 같았다.
순식간에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는 놀라 혼비백산하였다. 적의 전세가 기울자 상승세를 탄 우리 군사들은 총 공세를 펴 무려 10배가 넘는 왜구를 섬멸시켰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 적은 겨우 70명만이 덕두산을 타고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전과
전투 결과 노획한 말이 1,600여 필, 빼앗은 병기와 적의 수급을 바친 것이 산을 이루었다.
또한 적이 흘린 피가 황산천을 붉게 물들여 7일 간이나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고『동국여지승람』은 적고 있다.
황산 전투는 고려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과감한 전술과 목숨을 건 분전 결과 이룬 대승첩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적이 두려워 싸우지 못한 장수들은 태조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부딪치며 죄를 빌었다.
이성계 장군은 정벌 도중에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개선 도중에 장군은 전주 오목대(梧木臺)에서 잠시 머물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불러 승전의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 싸움을 황산대첩 또는 운봉정산전(雲峰鼎山戰)이라 불렀는데, 나세와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과 정지의 남해대첩(1383),
그리고 최영의 홍산대첩(1383)과 함께 고려 4대 승첩이라 한다. 이중 전북 지방의 2대 승첩이 황산대첩과 진포대첩이다.
황산대첩은 왜구의 침략에 고전하던 고려조정에 큰 근심을 덜어주었으며, 고려조의 육전 승첩 중 가장 통쾌한 승전보였다.
황산대첩이 없었던들 남원이 함락되고 그 여세를 몰아 전주까지도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상 의미가 크다 하겠다.
화수산 서쪽 석벽에는 황산전투에 참가하여 생사고락을 같이한 여러 장수들의 공적을 함께 기리기 위해
「동고록(同苦錄) 정왜경신이신(征倭庚申李紳)」이란 아홉 글자와 8원수 4종사의 이름을 새겼다.
1991년 남원문화원에서 발간한『황산대첩과 유적』의 기록에는 8원수를 왕복명·우인열·도길부·박임종·홍인규·임성미·이원계·이지란으로,
4종사를 정몽주·장사길·남은·배극렴으로 적고 있으나 그 근거가 확실치 않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지금도 <피바위(血岩)> <인월(引月)> <군마(軍馬)동> <인풍리(引風)리> <명석(鳴石)치> <고남산 제단> <정산봉> <서무·동무> 등
황산대첩의 유래를 담고 있는 지명과 전설이 운봉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
태조가 평생 전장을 누비며 타던 준마가 여덟 마리가 있었다. 그 중 운봉에서 타던 말의 이름은 <유린청(遊麟靑)>인데,
함흥 산으로 죽을 때까지 화살을 3대 맞았다고 하였다. 31살에 죽자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고 하였다.
디시엔뉴스 박성출 (natecenter@na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