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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Aug

수도를 보위한 해안방어의 거점, 안흥진성

작성자: [레벨:17]한국의 산하 IP ADRESS: *.229.176.224 조회 수: 9795

-안흥진성은 삼남지방의 물류거점이자 군사시설을 갖춘 민·군 복합형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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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진성의 서문인 수홍루

 

 

경상도 식량운반선 16척이 안흥량에서 침몰되었다(태조 7권, 4年, 1395年 5월). 전라도 식량운반선 54척이 안흥량에서 선적 전체가 침몰·실종되었다(세조 2권, 1年, 1455年, 9월).
왜구가 중국으로부터 30여척을 이끌고 황해도 소청도를 지나 안흥량에 이르러 2척으로 공물선 9척을 노략하고 대마도로 들어갔다(세종 4권, 1年, 1419年 7월).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강대국은 경제와 군사를 복합적으로 운영했다. 경제는 생산과 소비를 두 축으로 구성되며, 소비는 유통의 확장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경제권을 형성시킨다. 교통의 요지에는 필연적으로 물류거점이 구축되고, 물류거점은 물자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청과 이를 보호하는 군사시설을 들어서게 한다.     

 

물자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흐르고, 이러한 순환은 영토와 경제권의 확장을 가속시킨다. 고대 로마는 도로를 통해 영토 확장과 경제번영을 이루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길 위에 보급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대영제국은 해로를 장악하여 세계를 제패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어떤 민족은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뻗어 나갔고, 또 어떤 민족은 해로를 통해 바다로 확장해 나갔다.

 

우리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고구려는 육로를 통해 요동을 지배했고, 해로를 열어 다양한 산물을 국내로 유통시켰다. 백제는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산동반도와 요서지역으로 진출했으며, 일본으로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신라 또한 당나라와 해상무역을 통해 千年 사직社稷을 이어갔다.

 

조선시대, 세계는 대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명·일 3국은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달리 주어진 국경 안에서 느슨한 무역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세계로 열려 있었던 유럽과는 달리 이들 3국은 폐쇄되어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연안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던 반면, 왜구는 비록 약탈과 노략이었지만 조·명 해안을 무대로 원정길에 올랐다. 왜구는 조선과 명국보다 더 멀리 세상으로 나아갔다.

 

조선은 삼남지방에서 생산된 산물을 한성으로 수송하는 유통 배후지 건설 및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 수단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서해안에 물류거점 및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이 중심에 태안의 안흥진성이 있었다.

 

 

진관체제에 의한 진鎭 중심의 국방체계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대외무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국내 경제력 기반은 조선·철강·자동차·IT·전자산업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대외무역은 거의 없었고, 국내 경제력 기반은 농업이었다.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고, 농민이 국가의 근원이었다. 자영농의 토지소유 및 세금납부(현물)의 형평성이 무너지면 농민들은 유랑걸식하게 된다. 농민들은 자영농으로 보장받는 대신 세금납부와 병역의무가 있었다. 자영농이 활성화되면 국가의 재정 건전성 및 해당 지역의 인구 밀집도가 높아진다. 이들이 안정된 삶을 영위한다면, 병농일치사회에서 국방체제는 각 도의 핵심 군사시설을 중심으로 주변 하위 군사시설을 하나로 묶어 유사시 신속하게 핵심 군사시설로 집결하여 지역을 자체적으로 방어하는데 효과적이다. 

    

조선은 인구 규모에 따라 지방행정조직을 목·부(목사·부사)-군(군수)-현(현령·현감)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방군사조직을 영營-진鎭으로 나누고, 직제를 병마사·수사(정3품, 소장)-첨사(종3품, 준장)-만호(종4품, 중령)-권관(종9품, 소위)으로 구분하였다. 병마사·수사가 주재하는 곳을 영, 그 이하가 주재하는 곳을 진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 북방 국경지대는 여진족이, 남방의 남·서해안에는 왜구가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책은 국경 및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국경과 해안지대는 각각 육군과 해군이 담당했다. 인구 계층은 양반-양인(농민 포함)-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인은 육군·해군 모두 복무했는데, 대개 상층 양인은 육군, 하층 양인은 수군에 복무했다. 육군의 주력군은 정병正兵이라 했으며, 정병에는 국경지대인 평안도·함경도에서 근무하는 정군正軍, 지방에서 근무하는 영진군營鎭軍, 그리고 한성으로 상경하여 궁성 및 도성을 지키는 시위패侍衛牌가 있었다. 영진군과 시위패는 기병이 주축이었다.

 

조선은 세종 때까지 국경지대에는 규정에 따른 징집대상자 이외에 미징집대상자로 분류된 일반 가구의 남자들을 징집대상자로 하여 향군을 조직했지만, 남방의 지방군사조직은 징집대상자만이 군에 복무했다. 국경지대에서는 각 도를 몇 개의 군사단위(군익도軍翼道)로 나누고, 각 군사단위는 다시 중·좌·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인근의 여러 고을을 소속시켜 하나의 군사단위로 만들었다. 반면 남방에서는 각 도에 영-진을 설치하여 육군은 지역방위 주력군인 영진군(상층 양인이 복무)과 지방에서 한성으로 상경하여 근무하는 시위패(최상층 양인이 복무)를 두었지만, 실제적인 군사조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안방어를 위해 해군을 두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군사체계는 군익도와 영진군 체제로 이원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경과 해안이 뚫리게 되면 내륙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부역대상이 아닌 일반 백성·공사公私노비를 대상으로 ‘1가구 1인’으로 편성한 잡색군雜色軍을 편제했다.

 

조선 건국 60여年 후 제7대 세조(재위 1455-1468)는 내륙 방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국방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1455年(세조 1) 평안도·함경도에 설치했던 군익도체제를 내륙 전체로 확장했다. 내륙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 주위의 여러 읍을 중·좌·우의 3익 체제로 정비하고, 지방관도 모두 군직을 겸했지만, 행정구역상의 도의 명칭과 지방군 파악의 도의 명칭이 서로 혼동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1457年(세조 3) 주요지역을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익’ 대산 ‘진’으로 표시하면서 ‘진’의 명칭을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하여 주변지역의 여러 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 체제의 핵심은 각 도의 지방장관이 군직을 겸하도록 하여 진鎭을 주관管한다는 것이다. 육군의 경우 각 도의 지방장관(관찰사, 현 도지사)이 해당 도의 군 최고사령관(병마사, 현 수도방위사령관)을 겸직하면 감영監營·병영兵營이 주진이 된다. 하위 지방장관인 목사·부사가 첨사를 겸직하면 목·부는 거진이 되어 실제적인 지역방위사령관이 되고, 최하위 지방장관인 군수·현령·현감이 절제도위·만호를 겸직하면 군·현이 제진이 되어 일선지휘관이 된다. 자전자수自戰自守 체제인 것이다. 해군은 업무 특성상 무관이 주진(수영水營, 해군사령부)에 거주하여 하위의 거진에 대해 지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진관체제鎭管體制를 뒷받침하기 위해 1463年(세조 9) 지방군의 명칭도 해군을 제외한 육군은 정군, 영진군, 시위패를 모두 정병으로 단일화했다. 각 진관의 정병은 요새지에 상주하여 유방군留防軍으로 근무하다가, 차례가 오면 상경하여 한성에 근무했다.

 

지방장관의 군사 지휘권 장악은 오히려 무관들과 갈등을 초래했고, 지방장관 스스로 국방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게다가 16세기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 발달로 자영농이 소작인으로 전락해 국가에서는 세금이 줄어들어 재정이 악화되었고, 농민들은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거나 유랑걸식하게 되었다. 군인의 군역부담을 지원해 주던 보인保人의 수도 감소되었다. 연해지역과 섬에서는 농지개간으로 인해 기존의 목장이 줄어들면서 말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병은 말을 소유하기가 어려워 보병으로 전락했다. 해군은 해상근무를 원칙으로 해상방어를 담당하고, 육군은 적이 상륙하면 이를 제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해상생활의 어려움, 각종 요역 동원, 해군 복무 기피 등에 따른 병력 수 감소로 제9대 성종(1469-1494) 때 진에 보를 설치하여 육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육군·해군 소속 진관 병력 수를 계속적으로 감소시키게 되었고, 자체적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6세기 중엽, 지방장관의 군사능력 부재 및 지역의 병력 수 감소로 유사시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고, 특정 지역에 여러 지역의 군사를 집결시켜 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로 이행해 갈 수밖에 없었다. 경제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하면 어떤 좋은 체제도 작동하지 않음을 1592年에 발발한 7年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다.  

 

1595年, 7年 전쟁이 교착상태에 있을 때, 조선은 명국 장군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의 속오법束伍法(다섯을 하나로 묶는 것)과 삼수기법三手技法(3개 병종 배치)에 따라 양인·노비 모두를 대상으로 군사체제를 정비했는데, 중앙군으로 훈련도감, 지방군으로 속오군을 두었다. 속오군은 대隊(대총)·기旗(기총)·초哨(초관)·사司(파총)·영營(영장)으로 조직되었는데, 대개 1대가 11명으로 해서 3대가 1기, 3기가 1초, 5초가 1사, 5사가 1영으로 편제되었다. 1영에는 영장1명, 파총5명, 초관25명, 기총75명, 대총 225명 및 2,475명의 병사로 편성되었다. 삼수병은 포수砲手·사수射手(활, 장병기)·살수殺手(칼·창, 단병기) 순으로 배치되었다. 대외정세 변화에 따라 전담영장제와 겸영장제를 설치했다.

 

 

태안반도의 물류 및 해안방어 체계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태안반도는 서해안의 물류 중심지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이 시기까지 운송은 주로 해로를 이용하였다. 운송기간이 육로보다 훨씬 더 길었지만, 대량운송이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 물품을 운송하기 위해서는 북쪽에서 생산된 산물은 황해도 장산곶을 거치고, 남쪽의 삼남지방에서 생산된 산물은 충청도 안흥진을 거쳤다. 전라도 나주 영산포성에서 출발한 운반선은 영광 법성포를 지나 군산의 고군산을 통과하여 보령 원산진에 도착한 다음, 안흥진을 거쳐 영종진을 통과하여 강화 도성(강도)과 한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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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지역의 물류 및 해안방어 체계

 

이 일대는 전라도 서부지역과 충청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으므로 홍주(홍성)에 목牧(목사, 정3품)을 설치하여 인근지역을 관할하였다. 특히 태안반도는 중국과의 인적·물적교류 확대와 여말·선초의 왜구 침입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해미와 오천에 충청도 전역을 통솔하는 육군 병영(병마사)과 해군 수영(수사)을 설치했다. 충청수영은 태안의 안흥진과 소근진, 서산의 평신진, 보령의 구마량진과 고만량진, 원산진, 그리고 보령과 군산 사이에 위치한 서천의 서천포진과 마량진을 관할했다.  백화산성은 1287年(고려 충렬왕 13)에 둘레 619m, 높이 3.3m로 축조한 석성이다. 이곳 봉수대는  동쪽으로 북주산, 남쪽으로 도비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태안읍성은 태종(1400~1418) 때 둘레  473m, 높이 3.6m로 축조한 석성이다. 동서남북 4대문과 4개의 우물이 있었다. 읍성 아래에 있는 경이정憬夷亭은 태안군수가 방어사를 겸직할 때 사용하던 곳이다. 안흥진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한성으로 가던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한 곳이다. 소근진은 1404年(태종 4)에 설치하여 만호를 두었으며, 1467年(세종 12)에 첨사로 승격되었다. 소근진성은 1514年(중종 9)에 축조되었다. 안흥진은 소근진이 첨사로 승격된 후 안흥지역에 분대를 설치하고(안흥량수安興粱戌) 소근진 첨사가 관할하였다. 1655年(효종 6) 안흥성이 완공되어 진鎭으로 승격하였다. 평신진은 1794年(정조 18)에 독립된 진으로 만들었고 첨사겸둔병파총屯兵把摠 1명을 두었는데, 곧 파하고 감목관을 두었다. 목장 둘레는 20리다. 

 

 

안흥진성

 

안흥진성은 서해의 끝자락, 태안반도의 마지막 육지인 정죽반도에 위치해 있다. 안흥진 앞바다는 조수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죽음의 해로’로 불린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성동산은 동·서·남·북 4곳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삼면이 절벽인데, 이 봉우리들을 연결한 것이 안흥진성이다. 동문·남문·북문이 위치한 곳은 봉우리 사이가 능선이고, 서문이 있는 곳은 봉우리 사이가 푹 꺼져 들어간 형태다. 내부는 외부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움푹 들어가 있다. 동북에 위치한 봉우리가 제일 높고, 이곳에서 사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북쪽에는 지령산 봉수대가 있다. 1447年(세종 29), 6진을 개척했던 김종서가 이 해에 충청도 순찰사가 되었는데, 김종서의 건의에 따라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연락신호 수단으로 포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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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진 위치 및 안흥진성 지도

 

안흥진성은 제17대 효종(1649-1659)의 북벌계획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효종은 1627年(인조 5) 후금(뒤의 청)의 정묘호란을 겪고, 1636年(인조 14) 청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송파구 삼전동 일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굴욕적인 사건을 접한 뒤, 청국에서 8年 동안 볼모생활을 했다. 조선으로 귀환해 왕위에 오른 뒤 속오군의 핵심 사령관인 영장을 전담영장제로 설치하고, 국방정책을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기도 선비 김석견이 건의하여 1655年 안흥진성이 완공되었다. 성벽의 돌에는 성을 축조한 군·현의 석공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인근 19개 군·현이 동원되었다. 수축 당시에는 4대문 모두 문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서문에만 남아 있다(동문 수성루壽城樓, 서문 수홍루垂虹樓, 남문 복파루伏波樓, 북문 감성루坎城樓). 이 성은 태안읍성, 백화산성, 소근진성 등과 함께 1894年 동학혁명 때 성안의 건물이 불에 탔다. 내부 시설은 관사 1동, 창고 2동, 군기고 2동, 조총고 1동 등이 있어 방어시설을 완비한 성이었다. 성 둘레는 1700m, 높이는 3.5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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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 아래에서 남문을 향해 본 안흥진성. 내부가 움푹 들어간 형태다.

 

고지도에는 안흥진 남문 아래 굴항掘項으로 표시되어 있어 해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토목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흥진성 서쪽 신진도 해안은 삼남에서 올라온 세곡 운반선이 정박했다. 그리고 안흥진성과 지령산 사이는 바다였는데, 일제시대 때 방파제가 건설되어 육지가 되었다. 예전 이곳은 해군 함정이 정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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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진성 남문과 북문(북문 사이로 보이는 것이 지령산이다)


 

민·군 복합단지로서의 안흥진성

 

조선시대, 물류와 군사시설에서 안흥진이 소근진 및 평신진과 비교해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18세기에 그려진 『해동지도』 「안흥진」 「소근진」 「평신진」에 잘 나와 있다.

안흥진과 소근진의 성곽 둘레는 각각 약 1700m(3621척, 포백척 47.3cm), 약 640m(1355척)이다. 평신진은 성곽이 없다. 가구 수는 각각 553호, 144호, 638호인데, 평신진에 가구 수가 많은 것은 목장 때문이었다. 군량미는 각각 1만6백1십5석(군량미 비축분 3천9백8석, 각 읍 이전미移轉米 6천7백7석, 1석(섬)은 144kg, 성인 1인이 1年 먹는 량)(1718年(숙종 38) 9월에 군량미 수만석이 비축되어 있지만, 군사는 십수명에 불과해 1천석만 비축하고 나머지는 각 고을에 분배해야 한다고 논의), 160석 4두(1두斗(말)는 80kg, 쌀1가마니), 281석 12두였다.

속오군은 안흥진과 평신진이 각각 1970명(1703年(숙종 29) 충청도 속오군은 2만 2천명), 해군 233명이었다. 함선은 안흥진이 대변선待變船 6척, 전선戰船 1척, 방선防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3척, 비선飛船 1척이 배치되었고, 소근진은 전선 1척, 방선 1척, 복물선 1척, 평신진은 방선 2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었다(대변선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연해의 요해지에 주둔시킨 군선으로 식량운반선으로 활용, 전선은 주력전투선, 방선은 중형전투선, 병선은 소형전투선, 사후선은 전투선에 부속된 소형 부속정, 비선은 연락선·척후선, 복물선은 화물운반선).

서해안의 유통흐름과 해안방어에 대한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어 안흥진성은 조선초기에서 후기로 내려올수록 태안과 함께 그 중요성이 증대되어 왔다. 시대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1400年대는 소근진첨사 관할 및 물류 중간 기항지로 역할을 담당했고, 1500年대는 7年 전쟁을 계기로 만호로 승격했다. 1600年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첨사가 주재하였고, 안흥진성이 축조되었다. 또한 1680年경에는 태안군수가 방어사를 겸직했다. 1700年대는 안흥진을 방어사로 승격하였고, 1800年대는 태안 방어사를 호서해군방어사로 승격하면서 안흥진은 첨사가 주재하였다. 1870年경부터 태안군은 태안부로 승격하여 태안부가 독립된 방어령이 되었다.

 

 

물류를 장악하기 위한 조선의 끊임없는 노력

안흥은 해로가 아주 험하여 예전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다. 이 명칭이 싫어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쳐 불렀으며, 현재 안흥이 되었다.

안흥진의 해로가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조선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60年간에만 200여척의 선박이 부서지거나 침몰해 1200여명이 숨지고 1만5800석의 쌀이 수장됐다. 신진도 아래에 있는 죽도는 2007年 어부의 통발에 걸려 고려청자·목간 등 2만3000점을 인양했다.

서해는 조차가 커서 얕은 해안의 해협이나 반도의 첨단부에서는 급격한 조류가 나타나는 지역이다. 이러한 급류는 연안 항해에 큰 위협이 되어왔다. 연안 항로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곳은 황해도 장산곶, 강화도 손돌목孫乭項, 그리고 태안반도 안흥량安興梁이었다.

세곡수송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조선은 가로림만과 천수만 사이 및 현재 안면도와 태안반도 남단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잇는 운하 건설이 추진되었다. 안흥량운하(가적운하加積運河, 가로림만의 ‘가’와 천수만 북쪽 좁은 만의 이름인 적돌강의 ’적‘을 따서 붙인 이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읍 인평리) 건설은 1134年(고려 인종 12)부터 1669年(현종 10)까지 530年 동안 10여 차례 이상 추진되었다. 총연장 7km 구간 중 4km만 완성하고는 굴착에 따른 백성들의 민원으로 중단되었다(현재 유적지로 남아 있는 지역은 평균적으로 운하 밑바닥의 넓이는 약 19m이고 상층부의 넓이는 52m이며,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이고 제일 높은 곳은 50m이다). 가적운하가 개통을 하지 못하자, 조선 인조 때 태안 사람 방경잠이 충청감사 김유에게 건의하여 태안반도와 안면도 사이를 굴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을 착항鑿項(판목, 파낸 목)이라 부르게 되었고,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고지도인 『1872年 지방도』 「태안지도」에는 가로림만과 적돌강 사이를 굴포掘浦, 안면도는 굴항掘項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제와 군사를 결합한 민·군 복합형 기지

현재 안흥진성의 정상에는 군사시설인 국방과학연구소(ADD) 시험장이 들어서 있다. ADD 시험장은 이외에도 진해 해상시험장, 창원 기동시험장, 다락대시험장, 대전 전자시험장, 해미 항공시험장을 운용하고 있다.

안흥진 종합시험장에서는 그동안 Mistral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발사 시험, 9K310E Igla-1E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발사 시험, 백곰 유도탄 발사 시험, K21 시험 등이 실시되었다. 2009年에는 ‘전천후 총포탄 시험장’ 준공식을 가졌다.

이와 같이 경제와 군사를 결합한 민·군 복합형 기지는 안흥진성 외에도 서해안의 평택과 남해안의 부산이 있다. 이들 두 도시는 한국경제의 물류 중심지이자 해군함대가 위치해 있다. 현재 제주도에는 관광과 군사를 결합한 민·군 합동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으로 뻗어갈 수 있는 교두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무역 10대 강국이지만, 2011年 상반기 대외무역의존도는 97%였다(2011年 상반기 중국 무역의존도는 20.2%, 2010年 일본 부품소재의존도 15%). 대외무역의존도가 높은 만큼 수출·입 물동량의 99.8%가 해로를 통해 수송되고, 이들 물동량의 97% 이상, 원유 수송은 100%가 이어도를 통과하여 제주 남방해역의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제주 남방해역의 대륙붕에는 약 230여종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한·중·일 3국이 미래 자원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어도에는 기후 및 해양자원 연구를 위해 해양과학기지가 건설되어 있다.
현재 일본은 2011年 방위백서에 독도가 자국 고유영토임을 분명히 하였고, 중국은 이어도가 중국의 배타수역에 속해 있으므로 자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제주 남방의 대륙붕이 중국 대륙으로부터 이어져 있고, 이 지역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한·중·일 3국은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에도 분쟁국가가 될 것이다. 일본과는 독도와 제주 남방의 대륙붕을 놓고 영토분쟁이 예상되며, 중국과는 간도와 이어도 및 제주 남방 대륙붕을 놓고 패권을 다툴 것이다.
제주도 남방 해상교통로는 우리나라 미래의 생명선이다. 제주도가 천혜의 관광자원을 활용해 지역경제를 활성화 하면서 우리나라를 보위하는 주요 거점이 되어야 한다. 해양강국으로 뻗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군 복합형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환경과 국익 모두를 담는 복합형 단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권순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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