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2011-Oct
누르하치의 침략을 대비하라! 반월산성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229.176.224 조회 수: 10238
-경제 파탄과 정치 실종, 그리고 궁궐 수축을 위한 매관매직에 병적으로 집착한 광해군이었지만 군사력 증강에는 아주 인색했다. 기미책이 작동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반월산성 동치성에서 북쪽 망대지로 본 건물지와 동벽.
“사령관과 지휘관은 군사를 모르고 병사는 전투할 줄을 모른다. 누르하치 철기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중략)…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건립하는 탓으로 요역이 많아 민력이 이미 고갈되어 하나의 궁궐에만 힘을 쏟아 비용을 줄이고, 나머지 역량으로 군수를 보충해야 한다.…(중략)… 화기수 7천 병력은 조선 해안을 방어하는 각 지역 병력의 총수다.…(중략)…(명군 징병요청에 대한 좌의정 한효순과 광해군과의 대화 중에서, 광해군일기 1618년 윤4월23일).
어떤 시대, 어떤 국가를 막론하고 민생경제가 피폐해지면 국가 운영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으며, 정치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는 정권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경제와 정치의 피폭 상황이 여러 차례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장기화 되는데도 민생경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 민심은 떠나게 되고 국방의 의무는 사라지며, 급기야 국가 보위가 위협을 받는다. 비록 군주와 신하들이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백성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더라도 군주가 백성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그 군주는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정권 유지 및 사회 발전의 기회를 다시 한번 더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순자는 “백성은 물이요, 군주는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엎기도 한다.“고 갈파했던 것이다.
조선의 수도, 한성을 방어하는 동북 방면의 배후지, 포천 반월산성은 조선 제15대 광해군과 그 시대를 이끌어 온 권력자들이 국가운영을 어떻게 해 왔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적을 헤아리는 것이 도리어 적이 우리를 엿보는 것만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시기에 후금을 정벌하기 위해 파병되었던 총사령관 강홍립과 파병군 1만3천의 행군 모습, 그리고 전장에서 산화한 전몰자 9천과 포로 4천의 비장함이 떠오른다. 반월산성 북쪽 끝자락, 망대지에서 바라본 철원 방향의 지형은 평탄한 개활지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산맥들이 달리고 있었다. 400년이 흐른 지금, 광해군은 즉위 3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원수 강홍립 묘(관악구 난곡동 소재)
반월산성 북쪽 망대지에서 본 철원방향
기미책(등거리 외교)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조선군 파병이 있었던 1619년까지 11년 동안 조선은 내부적으로 더 이상 봉합할 여지가 없는 광기어린 정치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흉년이 해마다 계속되어 다음해의 풍작을 기대할 수 없었다. 백성들과 군인들은 과도한 토목공사에 허리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조․일 7년 전쟁(1592-15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종전 후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전후 복구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조선은 통합의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만주에서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명과 조선의 강력한 군사 라이벌로 성장해 있었다. 건주여진은 15세기에 약탈경제를 유지하면서 명과 조선으로부터 농기구와 농업기술을 도입하여 농경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회의 정착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누르하치는 1583년 주변의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하여 1588년 건주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그리고 건주여진 북쪽에 있었던 해서여진의 네 부족 중 하나인 합달부를 1599년 병합한 이후 1605년 국호를 ‘건주국’이라 칭했다. 1607년 휘발부를 병합하면서 조선에 국서를 보내어 후금이 조선과 대등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누르하치는 명국의 경계선을 약탈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전략적으로 호해의 분위기를 끌고 나갔다. 북방의 해서여진도 문제였지만, 남방의 조선이 큰 걸림돌이었다. 조선이 경제와 정치,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었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명과 조선이 연합하여 후금으로 진공해 올 경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은 분명했다. 1613년 오랍부를 병합하면서 나머지 한 부족인 엽혁부만이 남았다. 조선과 명국이 조․일 7년 전쟁 및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을 때 누르하치는 내부적으로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면서 영토전쟁에 돌입하여 병합한 부족에게서 노동력과 병력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건주국의 팽창에 위험을 느낀 명국은 요동 총독이 조선에게 7천 병력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조선과 명은 외교문서 작성시 인접국에 접해 있는 지방관이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례가 있었다. 물론 문서 내용은 황제(왕) 및 중앙정부의 결정을 담고 있지만, 서명은 지방관이 했다.). 누르하치는 1616년 ‘건주국’에서 ‘후금’으로 개칭하고, 명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1618년 4월 무순성 공격을 시작으로 7월 청하보 공격을 개시했다.
명국은 제14대 만력제(재위 1572-1620) 시기였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올라 장거정을 등용하여 내정 개혁을 추진하고, 장거정은 척계광과 이성량을 등용하여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장거정이 1582년에 죽고, 척계광이 1587년에 죽음으로써 명국은 정치․경제와 군사 부문에서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건주여진이 팽창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만력제가 친정을 하면서 환관들의 세력이 커져갔다. 국가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고, 정무는 환관들이 장악해 나갔다. 조․일 7년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에 파병을 하면서 국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618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무순을 점령하자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대신들이 요동 방어를 위한 군비가 모자라 만력제의 금고인 내탕內帑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만력제는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기미책羈靡策은 현대적인 의미로 ‘등거리 외교’라 할 수 있다. ‘기羈’는 말 머리에 씌우는 굴레를, ‘미靡’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다. ‘기미’는 원래 중국이 흉노와 같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주변 오랑캐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주변국이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졌지만 갑자기 군사력이 강대해졌을 때 취했던 방식이며, 거래 수단은 인질 교환 및 조공, 그리고 관직 수여 및 녹봉 지급이었다. 그러나 기미책은 기본적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타국과 비교해서 우위 내지 대등 혹은 일시적인 열위에 처했을 때 작동될 수 있다. 타국(오랑캐)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시키는 소극적인 대처 방법이다. 후금이 군사강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을 때, 조선은 광해군 11년 재위 기간 동안 나라를 보위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 통합과 경제력 및 군사력을 갖지 못했다. 기미책이 작동될 수 없는 토양을 광해군과 권력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버렸다.
광해군 11년, 조선은 스스로 무너졌다!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적통이 아니라 서자 출신이다. 조․일 7년 전쟁으로 17세 때 세자가 되어 전장에서 제2정부를 이끌면서 조선을 수호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전쟁 종료 10년 후인 1608년, 광해세자는 제14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했다.
광해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이이첨․정인홍․강홍립 등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초기에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과 7년 전쟁을 지휘했던 이원익․ 이항복․이덕형 등 중신들을 골고루 등용하면서 극단적인 당쟁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제11대 중종에서 제13대 명종을 거치면서 조선은 왕권에서 신권으로 정치체제가 바뀌고 있었다. 제14대 선조 때는 신권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고, 제15대 광해군 때는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광해군은 신권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정치기반이 약한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 중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음모와 권모술수로 중신들을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광해군은 왕권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부모형제도 정적으로 간주해 살해하고 말았다. 그후 숱한 역모 사건이 발생하여 광해군 자신이 친히 죄인을 추궁하는 횟수가 빈번하였다.
선조는 생전 56년 동안 8명의 부인을 두고 14남 11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은 의인왕후 박씨, 둘째 부인은 인목왕후 김씨, 셋째 부인은 공빈 김씨였다. 첫째 부인은 자식을 보지 못했고, 둘째 부인은 공주 1명을 낳고,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유일한 정궁正宮의 자식인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였다.(영창대군 쪽 인사들을 소북파, 광해군 쪽 인사들을 대북파라 함). 임해군과 광해군은 셋째 부인 소생이었다. 명에서는 임해군을 왕위에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선조가 1608년에 죽으면서 그해 2월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에 의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1609년 이이첨의 농간으로 임해군을 죽이고 1614년 영창대군을 역모 연루죄로 강화도로 보내 강화부사 정항의 손에 참혹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무순성을 공격한 1618년, 광해군은 국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죽여 버렸다.
조․일 7년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피폐하여 전후 재건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인구 증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를 활성화하기에는 인구가 턱없이 부족했다. 조선시대 때의 인구조사 및 기타 조사는 현재의 통계조사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543년(중종 38년) 군역대상자만을 조사하는 호구조사에서 조선의 인구는 약 4백1십6만이었고, 노비․10세 미만 아동․유랑민 등을 포함한 총인구는 약 1천1백6십3만이었다. 7년 전쟁을 겪고 난 이후 인구 생존율을 약 65%로 보는 것이 학계의 견해인 점을 감안하면, 광해군 때 조선의 인구는 약 7백5십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을 책임지는 병력은 1609년 평안도 1만6백, 함경도 7천을 포함하여 7만6천4백이었다.(세종 때의 병력 약 20만, 중종 때의 병력 30만과 비교하면 조선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경제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토지 면적은 조․일 7년 전쟁 직전인 1591년에 약 170만 결에서 광해군 시절인 1611년에는 약 54만 결로 감소되었다. 게다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가뭄이 들고, 1610년까지 3년 연속으로 흉년이 들었다. 이 시기 대북파 조차도 궁궐 수축을 중지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창덕궁 신축을 완료하고 창경궁을 수리하도록 지시했다. 3년 후인 1614년부터 파병이 있었던 1619년까지 지역적으로 흉년이 들었다. 1617년부터 궁궐 수축에 따른 재정부족이 초래되었다. 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서별궁(경희궁)․인경궁(현재 사직동 일대, 인왕산 밑에 왕기를 누르기 위한 미명 아래 자수궁, 경덕궁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중지됨)이 신축이 완료되었거나 추진되고 있었다. 궁궐 수축에 필요한 비용은 1개월에 면포 수백동과 양곡 5천여 섬이 지출되었기 때문에 궁궐 대지 및 집터, 궁궐공사에 필요한 건설자재를 제공한 사람에게는 관직을 부여했다. 면포와 양곡에 대해 수량, 단위에 대한 현재의 가격, 조선시대와 현재의 가치 차이 5배(정승과 국무총리 월급)를 적용하여 계산하면, 궁궐 2개를 11년 동안 수축할 경우 총비용은 약 2조2천억원이 소요되었다.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이 금액은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후금이 무순성과 청하보를 공격할 때, 조선 대신들이 궁궐 수축을 하나로 줄이고 나머지 비용을 군수조달에 사용할 것을 건의했지만, 만력제와 마찬가지로 광해군 역시 거절하고 말았다. 화약의 연료인 염초를 청기와 굽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은 토지 면적 감소 및 지력 하락, 반복되는 흉년, 궁궐 수축에 따른 재정 악화에 이어 조선의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것은 명나라 사신에게 지급한 은의 대량 유출이다. 은의 유출은 즉위 초기와 1619년 심하전투 후 제2차 파병과 맞물려 있다. 1608-10년 3년 연속으로 명국 사신에게 지급한 은은 8만냥 이상이고, 1621-22년에는 9만냥 이상이다. 은은 특정계층에 한해서 사용된 것이지만, 상품화폐라 할 수 있으므로 은의 대량 유출은 통화량 감소를 가져와 경기침체를 가속화했다. 은 10돈의 현재가격으로 계산하면 즉위 초기에는 200억, 2차 파병 요청 기간에는 225억이 유출되었다.(『광해군」의 저자 한명기는 은 수만냥은 조선왕조 1년 재정의 3분의 1과 맞먹는다고 했다). 사신 접대비 및 은의 대량유출에 따른 신용창출 기회 상실 등을 고려하면 비용은 더 많았을 것이다. 궁궐 수축 공사와 은의 대량유출은 조선 경제를 치명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백성들은 세금부담 증가와 함께 물가상승의 2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 세종 때부터 평안도(압록강) 및 함경도(두만강) 북쪽에 있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은 관직을 주고 월급을 지급해 왔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누르하치 통제하에 들어간 광해군 시절에도 조선은 여전히 여진부락들에게 계속적으로 녹봉을 주고 있었다. 여진부락들은 조선에게 녹봉을 계속 받으면서도 후금에 대해서는 조선의 정보를, 조선에 대해서는 후금의 정보를 각국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광해군 시절 후금에 대한 정보는 거의 모두 공개된 정보였을 것이다.
덕수궁 즉조당(우측) 광해군이 즉위한 곳
창덕궁 인정전. 광해군이 정사를 보던 곳
광해군의 군사력
광해군 즉위 2년 후인 1609년 한성을 포함한 조선의 총병력은 7만6천4백이었다. 1618년 10월, 후금 정벌 파병군, 평안도 및 함경도 방어 병력까지 포함할 경우 약 3만이었다. 이 병력은 조선 병력의 약 40%에 해당된다. 단순한 파병이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건 파병이었다. 사관들이 기록한 것처럼 광해군이 ‘밀지’를 통해 ‘형세를 보아 진퇴를 결정하라’는 것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619년경 후금의 총병력은 최대 약 8만으로 추정된다. 1614년 평안병사 이시언이 ‘누르하치의 본부 정예병은 1만여 명이고, 여진부락을 약탈하면서 획득한 병력을 포함하면 수만명은 된다.’고 보고한 것과 1619년 3월 살리호 전역 중 마지막 전투인 심하전투에서 ‘후금군 3만 기병이 투입되었다.’고 기록한 이민환의 책중일록을 볼 때, 이 시기 후금의 총병력이 최대 8만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살리호 전역 때 후금 도성 북동쪽에서 벌어진 1차 및 2차 전투에 약 5-6만여 명이 투입되었고, 도성 남쪽에서 벌어진 3차 전투인 심하전투 때 투입된 3-4만 병력은 1차 및 2차 전투에 투입된 병력과 함께 도성 방어 병력 및 도성 남쪽에서 조명연합군을 방어하고 있던 병력을 모두 합친 병력일 것이다.
명국의 경우, 요동 정벌군 48만은 후금을 협박하기 위한 병력이고, 당시 국방부장관이 밝혔듯이 군적부에는 요동 병력이 20만(혹은 14만)이었다. 살리호 전역 후 후금이 요동 전선을 다시 침범할 때 개원․심양․요양에 주둔한 군사 상황을 보면 20만(혹은 14만) 병력은 존재했으나, 짧은 기간에 병력 모집이 쉽지 않아 남방에서 병력을 모집해야 했다. 따라서 살리호 전역 때 출전한 병력은 약 8-9만이고, 나머지 병력은 요동 관내에 있으면서 전선을 잇는 곳에 주둔해 있었을 것이다.
광해군의 군사정책이 어떠했는가는 무기 생산 및 산성 수축 등을 통하여 예상해 볼 수 있다. 무기 중 화포는 조총·불랑기·백자총·삼혈총통·파진포 등이 있었지만, 주된 무기는 조총이었다. 활 및 창, 그리고 조총을 비롯한 화기 등의 무기 제작은 매년 이루어졌다. 그러나 1614년 6월 중앙에서 평안병사 이시언에게 조총 30자루를 제공하면서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데다 각 처에 보급하여 현재 비축한 물량이 없다고 한 점(이 시기 이시언이 화기 중 화포가 최상이며, 삼안총(삼혈총통) 역시 좋다는 보고에 따라 광해군은 화포제작의 필요성을 느껴 화기도감에서 각종 화포를 제작하고 그 제작과정을 1615년 ‘화기도감의궤’에 기록했다), 1618년 6월 평안병사 김경서가 평안도에 비치되어 있는 조총이 2천여 자루인데, 3-4백 자루가 부족하여 중앙에서 급히 보급해 달라고 한 점, 그리고 심하전투가 끝난 5개월 후인 1619년 8월 명국에 보내는 문서에 조선은 수천 명의 화기수와 수천 자루의 조총이 적진에 함몰되어 국내에서는 군사와 병기를 조달할 길이 없다고 한 점 등으로 보았을 때,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무기 제작은 충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약의 연료가 되는 염초焰硝는 전량 명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목민서 『거관대요居官大要」에 조총 1자루 가격은 5냥, 염초 100근(60kg)은 60-70냥이라 했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조총 1자루 제작비용은 약 1백3십만원, 염초의 수입비용(화약 100개 생산)은 약 1천9백만원이다. 조총 2천 자루 생산에 26억이 소요되고, 조총수 2천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어 일시에 적을 향해 1발을 발사하는데 드는 염초 비용은 약 38억이다. 현재 유사시 개인화기 소총수에게 지급되는 총알은 개인당 150발인 점을 고려하면 염초 비용은 약 5천8백억원이 소요된다. 궁궐 수축시 청기와 제작에 염초 3만근이 소요된다는 기록(광해 10년, 1618) 및 명나라에서 매년 수입해 오는 염초는 3천근(선조 39, 1606)이라는 기록 등을 참고 했을 때, 거대한 토목공사에 비해 무기생산에 투하된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성 수축 및 보수 역시 준비하지 않다가 서둘러 행한 흔적이 역역하다. 누르하치의 조선 침략이 예상되던 1608년에서 1610년까지는 평안도 및 한성의 4대 배후지를 중심으로, 그리고 1618년 4월․7월 후금이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무순성과 청하보를 공격한 후인 6월-9월 사이에는 서로(평안도) 및 북로(함경도․강원도 북부․경기 동북)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북로에 위치한 포천의 경우, 조정에서는 7월에 북관 직로에 진영이 없어 포천과 영평 경계에 부를 설치하여 외영이라 하고 파주와 상응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8월에는 대도호부로 만들어 감영을 설치하여 북로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9월에는 이성구 영평 판관을 파견하여 반월산성을 수축하게 했다. 심하전투가 끝난 한달 후인 1619년 4월 영평부를 포천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두 현이 분리된 것은 1629년(인조 7년)이다.
반월산성半月山城
반월산성은 포천의 분지 위에 솟아있는 청성산(283m)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험준한 산맥으로 차단되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한천과 서남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고교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있어 동서남북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청성산은 북쪽 사면이 경사가 급하고 남쪽 사면이 완만하며, 북쪽 사면은 서쪽과 동쪽이 낮고 중앙이 솟아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 따라 반월산성은 동서축이 길고 남북축이 짧아 마치 반달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안팎을 쌓은 다음 가운데 부분은 막돌로 채워놓는 협축법과 흙을 다져 쌓는 판축법을 동시에 사용하였고, 경사가 급한 곳에는 층계형식 축조법을 사용하였다. 비교적 완만한 지역은 암반을 수직에 가깝게 굴착하여 단을 조성한 후 그 위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반월산성은 『대동지지』에 1618년(광해군 10) 영평에 감영을 두고 판관判官(종4품, 지방관의 행정 및 군정을 담당) 이성구가 개축하여 1623년까지 사용하였으며, 둘레가 1,930척이고 성안에는 두세 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월산성 지도
반월산성에 대한 발굴은 1994년 이후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 성을 최초로 축성한 세력은 백제라고 한다. 1995년 ‘馬忽受解空口單마홀수해공구단’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마홀군이 현재의 포천군이라는 근거를 분명히 했다. 산성 역시 이때 수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2001년 발굴조사 결과, 동문지 성벽 안쪽에서 신라 토기와 함께 백제 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백제가 이 성을 축조하여 4세기까지 사용하다 광개토대왕대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면서 백제성곽에 고구려 건축물이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마홀군이 명시된 기와가 제작되었고, 진흥왕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이 성은 신라의 북방진출에 중요한 전진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문. 길이 7.5m, 폭 1.48m이다. 좁게 만들었다.
서치성. 포천 및 남북 방향으로 관찰 가능하다.
현재 반월산성은 둘레 1,080m, 동서 길이 490m, 남북 길이 150m이며, 성벽 높이 4∼5m이다.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성벽 위에 여장시설은 확인되지 않았고, 성벽 안쪽에는 대략 7-8m 정도 폭의 회곽도廻郭道를 만들어 병력의 신속한 이동과 배치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문지門址는 남문지와 북문지 두 곳이 확인되었는데, 남문지는 남벽에서 서쪽으로 꺾이는 지점에 설치되어 주출입문으로 활용되었고, 북문지는 북벽 평탄대지 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양쪽에 벽석을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걸쳐 네모진 모양으로 만든 평거식平据式이다. 건물지는 현재의 헬기장 주변과 망대지 뒤쪽, 성안으로 진입하는 출입구 부분 등 여섯 곳에 걸쳐 확인되었다. 치성은 남․서․북서․동쪽 등 모두 네 곳이 확인되었고, 장대지는 두 곳, 우물지도 두 곳이 확인되었다. 우물은 원형으로 돌을 쌓아서 만들었으며, 직경은 1.7m 정도이고, 6-7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반월산성 남쪽에는 조선시대 포천현의 관아 및 향교가 있다. 이 산성과 연결되는 남쪽 봉화대는 객사 남동쪽에 있는 포천시 내촌면 진목리 봉화대이고, 북쪽 봉화대는 천주산 서쪽의 봉화산이다. 판관 이성구는 반월산성을 수축하면서 북쪽 망대지를 자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봉화산에서 봉화가 오르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했으리라!
<다음 호에 계속, 살리호 및 심하 전투>
DCN 권순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