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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유왕과 포사, 그리고 당 현종과 양귀비

-3,000년의 역사, 역대 황제들의 행궁, 화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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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청궁(지)華淸宮(池)은 당唐 제국의 제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당대의 이백李白과 백거이白居易가 시로 표현한 이후, 사랑에 대한 연민과 연인에 대한 낭만적인 장소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제2의 황궁(행궁)이자 절세미인들과의 놀이터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결코 낭만적인 장소는 아니다.

 

  주周 유왕幽王(BC781-771)은 이곳에 여궁驪宮을 지었고, 진시황(BC259-210)과 한무제(BC140-87)도 이 자리에 행궁行宮을 세웠다. 또한 당나라 제2대 황제 태종(재위 626-649)은 644년에 탕천궁湯泉宮을 세웠고, 제3대 황제 고종(재위 649-683)은 671년에 탕천궁을 온천궁溫泉宮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제6대 황제 현종(재위 712-756)은 742년에 진시황제가 여러 유학자를 생매장하였던 장소인 이곳에 장생전과 집령대를 신축하여 유생들의 혼령을 제사지내고 화청궁華淸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역대 황제들은 왜 이곳에 행궁을 세웠을까? 현재의 섬서성 일대는 중앙의 서안 평야지대(관중關中 분지盆地)를 중심으로 남부에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이, 그 너머에는 다바산맥大巴山脈이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이 두 산맥 사이에 한중漢中 분지盆地가 있다. 또한 관중분지 북부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수를 중심으로 동서에 해발고도 1,000m 이내인 섬북고원陝北高原이 위치하고 있다.

 

  진령산맥은 전체 길이 1,500km, 동서길이 약 400~500km, 남북길이 약 100~150km, 해발고도는 2,000~3,000m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며, 서쪽에는 태백산太白山(3,767m)이, 동쪽에는 5악岳의 하나인 화산華山(2,437m)이 있다.

 

  서안이 있는 관중분지는 사방 800리이고, 연 강수량은 600mm에 불과하여 논이 없고 밭에 1년 2모작하여 밀과 옥수수를 생산한다. 섬북고원 너머에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해발 고도 1,000m~2,000m의 황토고원이 있다. 온통 황토로 된 지형이어서 중국의 젓줄 황화가 이곳을 지날 때 흙빛을 낸다. 함께 한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섬서성 일대는 건조한 기후로 인해 온천이 나오는 곳이 2곳 뿐인데, 그 중의 하나가 여산驪山 밑에 있는 화청지라고 한다.

 

   여산 및 화청지 위치도

 

  섬서성 일대의 지형을 보면, 화청지가 위치한 곳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를 알 수 있다. 예전 중국 고대국가의 도읍, 함양과 장안(서안)에서 여산은 하루 거리이다. 여산은 진령산맥이 서에서 동으로 약한 포물선 형태를 이루다가 서안을 지나 서북 방향으로 고개를 쑥 내민 형태이다. 국가 비상사태가 있을 경우,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설치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함양과 서안을 중심으로 발달한 국가가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할 경우, 혹은 동쪽에 위치한 국가들이 함양과 서안을 향해 진격할 경우에도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당 시대 이전에도 이곳이 역대 왕조의 행궁으로 자리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 화청지 위쪽에는 주나라 때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화청궁 지도 왼쪽 제일 위에 있는 봉화루 유적지가 여산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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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아래의 화청궁 안내도

◈ 주周 유왕幽王과 포사

  중국 역사에서 주周 나라는 기원전 1027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했던 고대국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국가이다. 기원전 771년을 기점으로 서주(도읍지 호경, 현재의 섬서성 서안)와 동주(도읍지 낙읍(양), 현재의 하남성 낙양, 섬서성 동쪽)로 나뉜다. 호경이 낙양과 비교해 서쪽이어서 서주라 하고, 낙양이 호경과 비교해 동쪽이어서 동주라 한다.

 

  기원전 782년, 주나라 제11대 왕인 선왕이 죽자, 그의 아들 희궁열姬宮涅이 제12대 왕인 유왕이 되었다. 선왕은 재위 46년 동안 주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인물이었다. 부인 강후는 선왕의 죽음을 지나치게 애통해 하다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왕은 어릴 때부터 난폭하였고,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였다. 소인배들과 어울리면서 술과 주색을 찾았고, 애통해 하는 빛이 없었다. 어머니 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술과 여색에 탐닉했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유왕은 현재 섬서성 동쪽 옆 하남성에 있었던 신申 나라의 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여 희의구姬宜臼를 낳았는데, 즉위 해에 이들을 신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신후는 유왕의 행동에 대해 여러 번 조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선왕때부터 함께 있었던 윤길보, 소호 등 원로대신들도 세상을 떠났다.

 

  대부大夫(제후 아래의 계급) 조숙대와 태사太史(궁중 기록관) 백양보도 조정의 일을 크게 걱정하며 유왕에게 간했다. 유왕은 아첨 잘하고 간특하며 무능력한 괵석부 등 나이 어린 사람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맡겼다. 조숙대는 괵석부 등을 간언하다 유왕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고 말았다. 포褒나라(현재의 섬서성 한중분지에 있었던 나라)의 제후 포향褒珦이 유왕을 만나 조숙대를 변호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조숙대는 후에 주나라를 떠나 제후국 진晉나라로 갔다. 제후의 아들이 주 나라 이전의 상나라 주왕을 멸망시킨 주 문왕의 고사를 떠올리고는 미녀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에 포사가 있었다.

 

  기원전 780년, 유왕은 호경에 올라온 미녀들 중 포사의 용모에 넋이 나갔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유왕은 포나라 제후를 방면하였다. 포사는 뛰어난 미모와 총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유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에 들어온지 1년 후 아들 희백복姬伯服을 낳았다.  

 

  유왕의 포악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포사의 자기를 길러준 포국에 대한 도리가 맞물려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포사는 왕후와 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포사에게 푹 빠진 유왕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기원전 773년, 유왕은 마침내 신후申后와 태자 희의구를 폐한 후, 신후를 옥에 가두고 희의구를 신申나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포사와 그녀의 아들 희백복을 각각 왕후와 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포사는 경사스런 일인데도 웃지 않았다. 아니, 궁에 들어온 후부터 웃지를 않았던 것이다. 유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괵석보가 여산에 설치되어 있는 봉화대에서 봉화를 올리면 주변 제후국이 구원병을 데리고 달려올 것이고, 이것을 보면 포사도 웃을 것이라 했다.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여산으로 가 저녁이 되자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봉화를 올렸다. 제후국들은 서쪽 오랑캐가 수도 호경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지원군을 편성하여 급히 달려왔다. 이때 유왕과 포사는 여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집결하고 있는 제후국의 군대를 보면서 즐기고 있었다. 제후들이 속속 집결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제후들에게 유왕은 심심해서 한번 장난해 본 것이라며 제후들을 돌려 보냈다. 제후들은 허탈하여 돌아가고 있었고, 이를 본 포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유왕은 괵석부에게 황금 1천냥을 하사했다.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봉화를 올렸다.

 

  기원전 771년, 유왕은 신申나라에 유배시켰던 태자 희의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외손자를 죽일 수가 없어 유왕에게 부당함을 알렸다. 격분한 유왕은 제후의 작위를 박탈하고 토벌 명령을 내렸다. 신나라의 제후는 만족蠻族 견융부락犬戎部落의 추장에게 호경의 모든 금은보화와 많은 남녀를 노예로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동맹을 맺었다. 견융의 추장은 즉시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였으며, 신나라의 군대도 그와 동시에 호경으로 향했다. 유왕은 작은 제후국과 오랑캐 부락이 연합한 것에 대해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견융부락의 군대가 호경성 턱밑에 왔을 때 봉화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봉화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만 제후국들은 오지 않았다. 제후국은 이번에도 장난이라 본 것이다.

 

  호경에 미리 잠입해 있던 신나라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자 견융부락의 군사들이 호경성으로 진입했다.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여산으로 탈출하였지만, 뒤따라온 견융의 군사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견융족에게 붙잡여 목이 달아났다. 포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2가지 이설이 있다. 하나는 견융의 추장이 포사를 보고는 그 미모에 반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나라의 제후가 견융부락의 황음무도한 행위에 분개하여 진晋, 위衛, 진秦, 정鄭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을 물리치고 포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포사는 신나라의 제후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는 것이다.

 

  유왕이 살해됨으로써 폐위되었던 아들 희의구가 태자로 복위하였고 평왕平王이 되었다. 이후 견융이 수도 호경으로 자주 침범하자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기게 되었고, 결국 서주西周시대는 끝이 났다.

◈ 당唐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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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반의 성공, 당 제국 몰락의 시초 중국 역사에서 당 제국의 번영을 가져온 황제는 제2대 태종 이세민과 제6대 현종 이융기이다. 태종 이세민이 경영하던 때를 ‘정관의 치’라 하고, 현종 이융기가 경영하던 때를 ‘개원의 치’라 한다. 현종의 경우, 재위기간 44년 중 전반기 20여년은 ‘개원의 치’가 분명 맞을 수 있으나, 후반기 20여년은 오히려 당 제국이 몰락하는 시초를 만들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이현일李玄逸(1627-1704)은 그의 저서 갈암집葛菴集에서 '당나라 현종이 사치를 일삼고 재물을 긁어 모았다'고 비판하였는데, 당 현종이 집권한 후반기를 가리킨다 하겠다.

 

 

역대 황제

관   계

생몰연대(나이)

(재위 기간)

재위 년수 및 비고

측천무후

제1대

고조 이연

 

556-637(70세)

(618-626)

9년

 

제2대

태종 이세민

이연의 2자

598-649(52세)

(629-649)

23년

 

제3대

고종 이치

이세민의 9자

628-683(56세)

(649-683.12)

34년

655년에 무측천 황후 등극

624-705(82세)

690-705(16년 재위)

제4대

중종 이현

이치의 7자(무측천 아들)

656-710(55세)

(683-684)(705-710)

2개월, 6년

부인인 왕후 위씨에게 독살 당함

제5대

예종 이단

이치의 8자(무측천 아들)

662-716(55세)

(684-690)(710-712.12)

684년과 690년에 각각 중종과

예종을 폐함, 예종을 무씨로 바꿈

제6대

현종 이융기

이단의 3자

685-762)(78세)

(712-762)

44년

 

  번영, 그 절반의 성공 제6대 현종 이융기는 제3대 고종 이치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친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역사의 한 페이지와 제4대 중종 이현의 황후인 황후 위씨(큰어머니), 제5대 예종 이단의 누이인 태평공주(고모)가 만들려고 했던 역사의 일부분을 도려내고 번영을 만들어 내었다. 제4대 중종 이현과 제5대 예종 이단은 측천무후의 소생이고, 제6대 현종 이융기는 제5대 예종 이단의 소생이다. 황후 위씨에게 측천무후는 시어머니이다.

  도려낸 그 자리에는 새로운 싹이 트기 마련이다. 현종 이융기는 요숭姚嵩, 한휴 등을 임명하여 국가경제를 튼튼히 하였다. 요숭은 현종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한휴는 언제나 현종에게 직언을 올렸다.

 

  현종의 열림의 정치와 그에 따른 신하들의 자발적 참여 및 직언 등으로 인해 현종은 민생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황위 쟁탈전, 씨족간의 아귀다툼과 간신들의 발호 권력은 부모형제지간에도 나누지 못한다고 했던가! 제3대 고종 이치가 병이 들어 말년이 되자 당제국은 측천무후의 손에 들어갔다. 고종이 죽자 제3대 황제 이치의 7남이자 측천무후 본인의 소생인 황태자 이현이 제4대 황제에 오르자 부인 황태자비 위씨도 황후가 되었다. 황후 위씨가 친정아버지를 요직(시중 자리)으로 앉히려고 황제에게 부탁하고 황제는 이를 들어주었다. 이 소문이 황태후 측천무후에게 들어가 이현은 취임 2개월만에 폐위되고 말았다. 측천무후는 제3대 황제 이치의 8남이자 자신의 소생인 어린 아들 이단을 제5대 황제에 올려놓고 국정을 처리했다. 7년 후인 690년에 제5대 황제마저 폐위시키고 본인 스스로 국호를 당에서 주周로 바꾸고 황제(신성황제神聖皇帝)가 되었다. 조정대신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699년 이현을 황태자로 복위시켰다. 705년 측천무후가 죽자 이현이 다시 황제가 되고, 이단은 형에 의해 상왕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사라진 자리에 황후 위씨가 들어 앉았다. 죽은 시어머니 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고자 했지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 당시 제6대 황제가 되는 이융기도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권력이 뜻대로 행해지지 않자 급기야 710년, 위씨는 딸 안락공주와 모의하여 남편인 중종 이현을 독살시켜 버리고, 어린 북해왕 이종무를 황제에 앉히고 조정을 장악하였다.

 

  당시 초왕이었던 이융기의 입장에서는 큰아버지가 독살당하고, 아버지가 황위에 복귀하지 못함에 따라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해 7월 우림군 군사를 소집하여 궁중에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위씨 일가 전부를 몰살시켜 버렸다. 그리고 신성황제라 칭했던 측천무후의 일가인 무씨 집안도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 고모였던 태평공주에게 제5대 황제였던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운동을 주도해 달라고 부탁하여 이단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 자신은 큰형이었던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가 되었다. 712년 아버지 이단이 황위를 이융기에게 물려주었다. 27세의 나이로 등극했지만, 고모 태평공주가 황위를 노리고 이융기를 여러번 독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713년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의 일당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었다.  

    

  조직이 오래되면 방만해지고, 그 속에 안주한 사람은 오만해 진다고 했던가! 20여년을 달려온 현종도 점차 거만해져 갔다. 거만해진 자리에는 아첨꾼이 몰려들게 되고, 직언하는 사람은 귀찮아지는 법이다. 순종하는 무리만 가득할 뿐이다. 무측천시대의 권력투쟁이 재현되고 있었다. 황제 본인이 외척과 환관 발호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방지하지 못했다.

 

  724년 현종은 왕황후를 폐하고 총애를 받던 무씨를 혜비로 삼았다. 무혜비武惠妃는 2남 1녀를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모李瑁이다.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이모를 수왕壽王이라 했다. 양옥환(후에 양귀비)이 17세에 결혼한 사람이다. 그 뒤에도 1남 2녀를 더 낳았다. 무혜비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738년에 황태자가 된 이형과 2명의 왕자를 모함하였다. 현종은 황태자를 폐하려 하였지만, 유능한 재상 장구령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종은 장구령을 좌천시켜 버리고, 무능하고 무식하지만 아첨에 뛰어난 이임보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이임보는 그 후 18년 동안 제1인자를 차지했다(734년~752년).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구밀복검口蜜腹劍(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이라 했다. 이임보를 승상에 임명한 해는 재위 2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개원의 치’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임보는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병권을 장악하였다. 변방의 책임자를 한족이 아닌 이민족으로 대체하였다. 안록산安祿山(703년-757년)은 아버지쪽으로는 이란계이며, 어머니쪽으로는 터키계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어머니는 돌궐족과 재혼을 했다. 안씨 성은 계부의 성이다. 변경 방비에 번장番將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742년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가 되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751년에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까지 겸해 변방 군사력의 1/3을 장악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고구려 후예 고선지 장군도 이 시기에 중용되었다. 

 

  737년 무혜비는 또다시 황태자와 왕자 2명을 모함하여 살해하였다. 이들이 죽은 후 무혜비도 곧 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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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시기의 10개 절도사 체제

 

  권력에 눈이 먼 양귀비와 사랑에 눈이 먼 현종 무혜비의 권력욕이 물러간 자리에는 양귀비의 권력욕이 또아리를 틀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낭만적이라 알려져 있다. 이백의 시가 나온 이래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각색되고 변색되어졌다.

 

  양귀비(719-756)는 원래 고아 출신이다.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어 사천성에서 자랐으며, 무혜비가 죽기 1년 전인 736년, 17세 때 무혜비의 아들이자 현종의 18번째 왕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무혜비가 죽고 난 뒤,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 이모의 부인 옥환이 절세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온천궁溫泉宮에서 그녀를 보고 총애하였다고 전한다. 현종은 수왕에게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옥환을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로 삼고 가까이에 두었다. 743년,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이 이곳에 있었다. 현종의 명을 받아 양귀비를 위해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읊었다.  

 

  745년, 궁중에 들어오자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 수왕 이모의 부인으로 있은지는 3년 미만이었던 것 같다.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부인夫人에 봉해졌다. 또한 오빠인 양소楊釗는 품행이 나쁜 인물이었으나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은 후, 양국충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 양국충이 후에 안록산의 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외에도 양씨 집안의 많은 친척들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通婚하였다.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進上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임보가 재상으로 있고, 양태진이 귀비가 된지 2년 후인 747년, 절도사 안록산이 장안으로 왔다. 현종은 성대한 잔치를 벌였고, 여기서 안록산과 양귀비가 처음 대면을 하게 된다. 이 무렵 안록산은 이미 현재의 북경을 방비하는 범양절도사였다. 이임보 후원 아래 안록산은 이융기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751년에는 변방의 군사력 1/3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안록산은 40대 중반, 양귀비는 28세, 당현종은 63세였다.

 

  현종은 양귀비의 셋째 언니인 괵국부인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양귀비가 이를 질투하여 괵국부인을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현종은 양귀비를 궁에서 내쳤다. 쫒겨난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있었는데, 양국충이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이융기와 화해를 시켰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같이 화청궁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녀의 육체를 본 현종은 다시 그녀에게 빠져 들었다.

 

  752년,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재정을 장악한 양국충은 동북 국경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안록산이 최대 정적이 되었다. 안록산을 제거하기 위해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록산이 모반하려 한다며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것이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양국충이 안록산을 제거하려 할 때 마다 양귀비는 안록산을 변호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

  양귀비와 현종, 그리고 안록산의 씁쓸한 최후 755년 11월,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정예기병 8,000기를 중심으로 15만 대군을 이끌로 낙양으로 진격하여 12월에 낙양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세웠다. 이에 당나라는 서북변 방위군을 동으로 이동시켜 동관潼關으로 보냈다. 고선지 장군은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었다. 이 때 고선지 장군은 본인의 주둔지인 섬주陝州를 떠나 동관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하여 반군을 격퇴하고 수도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임의로 주둔지를 떠나 피해를 입혔다는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고 만다. 하북에서는 태수인 안진경과 안고경이 안록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칭송한 곽자의와 하동절도사 이광필은 안록산의 절친한 친구이자 부장인 사사명史思明을 격퇴하였다. 한편 하남에서도 수양성을 사수한 허원과 장순이 항전을 계속하였다.

 

  756년 6월 양국충은 동관에서 결전하기로 명령을 내렸는데, 작전 미숙으로 부원수로 임명된 가서한哥舒翰이 이끈 방위군이 대패하여 안록산의 대병이 장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화북지방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종은 황태자, 양귀비, 양국충 등과 더불어 섬서성 서쪽인 사천성으로 도망가던 중 장안성 서쪽 50km 지점에 있는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다. 기아에 지친 병사들이 양씨 일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양국충과 그 일가 모두를 죽일 것을 강요하자,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는 것을 호위군사들이 그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 갈겼다. 이들은 현종이 쉬고 있던 역관에서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자 현종 자신이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호위군사들은 계속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고, 환관 고력사 역시 선택이 없다고 하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현종과 함께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은 마외역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다. 두홍점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형에게 양위를 물려줄 것을 주청하자, 현종은 장안성 북서쪽 400km 쯤에 있는 현재의 감숙성 영무靈武에서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당 제국의 제7대 황제인 숙종肅宗이다(재위기간 756-762). 우리나라의 고려 사서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그를 태조 왕건의 고조부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였다. 숙종은 장군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반란군 토별 명령을 내리고, 제위를 물려준 현종은 장안성 서남쪽 500km 쯤에 있는 사천성 성도로 들어갔다.

 

  양귀비가 죽은 것이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었을까? 장안을 점령한 안록산은 장안성 관리를 부하들에게 일임하고 말았다. 시력이 약해지고, 악성 종기를 앓게 되자 명령도 제대로 서지 않았다. 또한 애첩의 소생을 편애함으로써 둘째아들인 안경서安慶緖와 반목하였다.

 

  757년 1월, 안록산은 아들 경서와 공모한 환관 이저아에게 취침 중 암살되고 말았다. 경서는 반란의 본거지인 범양을 사사명에게 지키도록 했다. 반란군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숙종은 장남인 태자 이예(훗날 제8대 황제 대종)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 원군의 도움을 받아 장안과 낙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9월에 곽자의와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고, 현종은 12월에 돌아왔다. 현종은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4년 후인 761년 2월, 범양을 지키고 있던 사사명도 아들인 조의에게 살해되었다.

 

  5년 후인 762년 5월 3일,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현종의 나이 78세였다.

  당 제국 쇠망의 단초 현종이 사망한 지 얼마 안 있어 대종 역시 병이 들었다. 황후 장씨가 태자 이예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소생인 월왕 이계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 이보국이 이를 알아차리고, 황후 장씨를 시해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병이 심하여 그런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결국 762년 6월, 이형은 황궁에서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달 사이에 두명의 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1년 후인 763년 1월, 조의는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에게 공격받아 타도되었다. 9년에 걸친 난이 종결되었다.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난을 일으켰다 하여 안사의 난安史─亂이라 한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한 낭만주의, 이백과 백거이 양귀비는 정사正史에 자질풍염, 절세의 풍만한 미인, 능한 가무歌舞, 그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함을 겸비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700년대 중반에 활발한 시적 활동을 하였던 이백李白(701-762)은 화청궁에 있었다. 743년 현종이 양귀비와 더불어 목단을 보며 즐기던 중, 현종은 이백을 불러 명창 이귀년이 부를 노래의 가사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이백은 술에 만취되어 있었으나 즉석에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 세 수를 지었다. 그러나 전에 술에 취해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 일로 고깝게 생각해오던 고력사가 위 싯귀 중 양귀비를 한漢나라의 성제成帝를 유혹한 조비연趙飛燕과 비유한 대목을 들어 양귀비를 부추겨 참소함으로써 이백이 추방되었다고 한다. 80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백거이白居易(772-846)는 804년, 32세 무렵에 양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소재로 영원한 애정의 곡曲인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생몰연대가 분명치 않은 당나라 때의 문학가 진홍陳鴻은 백거이가 남긴 시를 바탕으로 장한가전長恨歌傳을 지었고, 송대의 학자이자 역사가인 악사樂史(940-1007)는 진홍의 장한가전과 내용이 거의 유사한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이라는 소설을 남겼다. 그 이후 윤색潤色은 더욱 보태어져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으며,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는 서안 출신의 장이모 감독이 화청궁에서 ‘장한가’를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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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 주차장에서 내려 화청지로 가는 길(306번 도로), 화청지 간판(100m), 케이블카 타는 곳(여산 정상까지 운행, 편도 30위안, 5,000원 정도)

◈ 오간청五間廳, 서태후와 장개석  

 

  화청궁 내에는 오간청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청나라(1636-1912) 시기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서태후와 대만 총통 장개석의 역사가 숨어 있다.

 

  서태후西太后 서태후(1835-1908)는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로 불리기도 하며, 청나라 제9대 황제인 함풍제咸豊帝(재위 1850~1861)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인 동치제同治帝(재위 1861~1874)의 생모이다. 함풍제가 사망하자 5세인 아들을 황제에 올려놓고 섭정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함풍제의 황후인 동태후東太后(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와 함께 실권을 장악했다.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려 18세에 사망하자, 서태후는 누이동생의 3살짜리 아들을 광서제光緖帝(1874-1908)로 올려놓고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는 해인 1887년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서태후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벌인 청불전쟁淸佛戰爭(1884-1885),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인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이 벌어졌다. 청나라의 고민은 깊어졌다. 위기감을 느낀 광서제는 1898년 강유위, 양계초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본받은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받아들여 무술戊戌변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변법파의 강유위,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황제는 궁중에 유폐되었다.

 

  1900년 1월, 서태후가 황제인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열강이 서태후의 의도를 간파하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그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청 정부의 수구파는 의화단의 반외세운동을 고무해서 열강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동년 6월, 의화단이 북경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러시아·일본·독일·영국·미국·이탈리아·벨기에 등 8개국이 파병해서 국경을 비롯해 양자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이때 서태후는 황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신하였다. 그러한 탈출의 혼란을 틈타 황제가 사랑한 진비珍妃를 죽였다. 이 시기에 이곳 화청지에 머물렀다.

 

  북경으로 귀환 후 입헌 준비, 교육 진흥 등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외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공고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사망하고, 그 다음 날인 15일에 서태후가 죽었다.

  장개석蔣介石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은 중국을 식민화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전쟁 물자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만주를 침략했다. 만주사변(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장개석(1887-1975)은 1918년 손문 휘하에서 군사 방면으로 활약했고, 1926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개시하고, 1928년에는 북경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장학량(1901-2001)의 아버지 장작림은 이 지역 군벌이었으나 국민당 장개석에게 패해 만주로 이동하였다. 기차로 만주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기차가 폭파되어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장학량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으며,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일본은 장학량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장학량은 고향과 근거지를 잃었지만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보다 공산당을 공격하는데 주력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공격으로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어 북쪽으로 25,000km 대장정을 하면서 달아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동북 3성을 잃게 되자 1933년 장학량은 유럽으로 떠났다.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장개석은 여전히 공산당을 괴멸시키는 일을 장학량에게 부여하였다. 1935년 공산당은 대장정을 거쳐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장개석은 1930년부터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전을 수행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침공에 대해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여론은 반대로 흘러갔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을 그치고, 항일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장학량과 그의 부하들 역시 동일한 생각이었다. 장학량은 공산당과 비밀협정을 맺어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1936년 12월, 장학량은 국민당 동북군 총사령관으로 섬서성 섬북陝北 지역에 주둔해 있는 공산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공산군에 대한 작전을 독촉하기 위하여 장학량군이 주둔하고 있던 시안으로 들어와서 화청지에 머물고 있었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전쟁을 중지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 12일, 장학량은 서북군 총사령관 양호성楊虎城과 함께 오간청에 머물고 있는 장개석을 습격하여 체포하고 그를 감금시켰다.

 

  서안사변西安事變은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장학량은 공산당 주은래周恩來, 국민당 송자문宋子文 등과 협의하여 ‘내전정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을 약속받았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제2차 국공합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이 해방된 후인 1946년, 서안사변을 기리기 위해 '군사를 이용하여 간하였다'는 뜻의 병간정兵諫亭을 세웠다. 높이 4m, 폭 2.5m로 병간정의 편액은 유명한 남전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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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 앞, 정문 앞쪽에는 화청궁, 뒤쪽에는 망경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시간이 부족하여 화청지 내의 부속 건물들을 모두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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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호와 장생전長生殿, 어명헌이다. 장생전은 당唐 태종太宗이 세운 이궁離宮이다. 722년, 당 현종이 신축하면서 화청궁으로 고쳐 부르고, 양귀비와 함께 거처하였다. 한창 공사중이어서 부용호의 멋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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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전飛霜殿은 당현종과 양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붉은 기둥과 섬세한 형태의 무늬가 조각된 침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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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호에서 바라본 여산과 서남쪽 방향의 의춘각(여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구룡호 건너편의 만하정과 신욱정, 용음사, 의춘각 오른편의 당어탕유지 박물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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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춘각과 당어탕유지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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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첫 번째 왼쪽은 귀비지貴妃池, 오른쪽은 연화탕蓮花湯. 두 번째 왼쪽은 성진탕星辰湯, 오른쪽은 상식탕尙食湯. 성진탕 뒤에 온천수온이 있고, 상식탕 앞에는 관광객이 씻을 수 있도록 온천이 나오고 있다. 그 앞에 양귀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성진탕 앞에 비석 푯말이 서 있는데, 예전 태자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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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귀비지와 연화탕, 양귀비의 생일날에 현종이 선물했다고 하는 양귀비의 전용 목욕탕인 귀비지(탕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았다 하여 후에 해당탕海棠湯이라 불렀으며, 또 달리 부용탕芙蓉湯이라고도 한다, 귀비가 된 후 2년 후인 747년에 건축되었다). 귀비지의 옆에는 황제의 전용 목욕탕이다(탕의 모양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연화탕蓮花湯이라 한다. 당나라 때의 이곳은 제왕과 비빈들이 연회를 여는 별궁이었는데, 매년 10월에 와서 봄에 돌아갔다고 한다. 당 현종은 714년부터 755년까지 41년간 36차례 이상 이곳에 왔는데, 양귀비를 만난 후 매년 데리고 와 겨울 동안 온천욕을 즐기면서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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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각飛霞閣(목욕을 마친 후 경치를 즐기며 망호정, 하화지荷花池를 거쳐 비하각에 이르러 머리를 말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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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첫 번째는 성진탕星辰湯, 두 번째, 세 번째는 상식탕尙食湯(성진탕은 당태종 이세민의 전용 목욕탕이며 644년에 건축되었다. 원래는 노천 야외탕었는데, 목욕할 때 하늘의 별이 보인다 하여 성진탕이라 불렀다. 앞쪽에 태자탕이 보인다. 상식탕은 관료들을 위한 목욕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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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수원지이다. 두 개의 수로를 따라 성진탕에 흘러간다. 34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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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수원지 옆에 있는 금사동金沙洞(양귀비의 피서지), 안쪽에 들어가면 일반인들이 온천수로 발을 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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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성 서안시 섬서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양귀비 조상(피부가 백옥같이 고왔다고 함)

 

 

  청평조사淸平調詞

  이백李白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살랑이는 봄바람에 영롱한 이슬이구나

  若非群玉山頭見 야비군옥산두견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군옥산 : 선녀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요대의 달 아래서나 만날 선녀여(요대 : 전설상의 신선이 산다는 곳)

  一枝濃艶露凝香 일지농염노응향     한떨기 농염한 꽃에 앉은 이슬의 향기(모란꽃 이슬이 향기가 응어리져 있음을 나타냄)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비와 구름 되어 찾아온다는 무산 신녀의 애절함이구나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나라 궁궐 누구와 비길까?

  可憐飛燕倚新장 가련비연의신장     비연이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단장할 장, 비연 : 한 성제 애첩 조비연, 당대 최고 미인)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양상환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 듯

  長得君王帶笑看 장득군왕대소간     바라보는 임금님 웃음도 가시질 않네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

  沈香亭北倚欄干 침향정북의난간     침향정 북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침향정: 화청궁 비상전 옆의 정자)

  장한가長恨歌

  백거이白居易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한황제 색을 즐겨 경국지색 찾았으나(한 무제, 실은 당 현종을 가리킴)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오랜 세월 구하여도 얻을 수 없었네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갓 성숙한 딸이 있어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집안 깊이 길러 누구도 알지 못했네

  天生麗質難自棄  천생려질난자기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 뽑혀 황제 곁에 있게 됐네

  回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한번 눈웃음지면 이는 애교 그지없어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단장한 육궁 미녀들의 얼굴빛을 가렸네(육궁 : 황후를 비롯한 다섯 후궁이 거처하는 궁)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화청지 목욕함을 허락하니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온천물 부드럽게 매끄러운 몸을 씻네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부축에도 연약하기만 한 교태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雲빈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구름 머리, 꽃 얼굴, 한들리는 금장식(살쩍 빈)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부용휘장 안에 따뜻한 봄 밤은 깊어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봄밤 한탄하며 해 높아 일어나니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부조조     황제는 이로부터 조회를 보지 않았네

  承歡侍宴無閑暇  승환시연무한가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봄에는 봄 놀이에 밤에는 밤 잠자리에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삼천 명에 내릴 사랑 그녀 혼자 받았네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황금방에 단장하고 교태로 밤시중 들고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봄기운에 취했네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제형개열사     자매와 형제 모두에게 영지를 내려주니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이윽고 그들 가문에 광채가 나게 되어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이에 따라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됐네

  驪宮高處入靑雲  여궁고처입청운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속에 들어 있고(여궁은 주나라 때 이곳의 명칭)

  仙樂風飄處處聞  선낙풍표처처문     선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느린 노래 나른한 춤 여운 긴 가락에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황제는 하루 종일 넋 잃고 바라보네

  漁陽비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내     돌연 어양 쪽 땅 울리는 전고 소리(마상고 비, 말 위에서 치는 북, 어양 : 북경시 밀운, 난이 일어난 곳)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예상우의곡을 놀라 멎게 하였네(예상우의곡 : 신선들 세계인 월궁의 노래 본뜬 곡조)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 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행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달아나네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행복지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역에 이르러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부발무나하     양귀비 처결하라 군사들이 멈춰서니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양귀비는 몸 뒤틀며 군마 앞에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군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황제는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루상화류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영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구름 닿을 듯 구불구불한 검각 오르네(얽힐 영, 검각 : 장안에서 촉으로 가는 요해처)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항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아미산 : 촉에 있는 산, 현재의 사천성)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行宮見月傷心色  항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밤비 속에 들리는 단장의 말방울 소리

  天旋地轉回龍馭  천선지전회룡어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부능거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니토중     양귀비 쓰러져 죽은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부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상고진첨의     황제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귀내지원개의구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 없어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연꽃도 미양궁의 버들도(태액지:궁궐 내 가장 큰 연못, 미앙궁: 한나라 궁전)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양귀비 얼굴이요, 버들은 눈썹이라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불루수     이들을 대하고 어이 아니 눈물 지리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며 살구꽃이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엽낙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  서궁남내다추초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섭만계홍부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어낼 사람 없네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이원: 당 현종 때 배우들의 기술을 가르치던 곳)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노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초然  석전형비사초연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근심할 초)

  孤燈挑盡未成眠  고등도진미성면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遲遲鍾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긺을 알았네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냉상화중     원앙 같은 기와에 서리꽃이 무거운데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함께 덮을 이 없어 싸늘한 비취금침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내입몽     꿈에서도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었네

  臨공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임공의 도사가 도성에서 머무는데(땅 이름 공, 임공: 사천성 소재)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위감군왕전전사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황제를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수교방사은근멱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  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낙하황천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부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선산 있어

  山在虛無표묘間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아득할 표, 아득할 묘)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영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玉眞  중유일인자옥진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삼차시     흰 살결 고운 얼굴 그인 것 같다 하네

  金闕西廂叩玉경  금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문빗장 경)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소옥 : 시녀나 궁녀 통칭, 쌍성 : 서왕모의 시녀)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이이開  주박은병이이개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며 모습을 나타냈네(비스듬할 이, 이어질 이)

  雲빈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각     구름 머리 반 드리우고 방금 잠에 깬 듯(살쩍 빈)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내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왔네

  風吹仙袂飄飄擧  풍취선메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당 현종이 꿈에 본 달 속 선녀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만든 춤)

  玉容寂寞淚欄干  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방울지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 비에 젖은 듯

  含情凝제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어린 눈길 돌려 황제에 전할 말을 하니(흘길 볼 제)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량묘망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소양전 : 한나라 때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들이 거처하던 궁)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봉래궁 : 바다 위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선들이 사는 산의 궁)

  回頭下望人환處  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경기 고을 환, 천자가 사는 직할하던 영지)

  不見長安見塵霧  부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오래 지닌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釵留一股合一扇 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씩 상자는 한 쪽씩

  釵擘黃金合分鈿  채벽황금합분전     황금 비녀 토막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양심지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어느 칠월 칠석날 장생전에서(장생전 : 당 현종과 양귀비가 거처하던 화청궁의 전각)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에 몰래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눈과 날개가 하나뿐이라 둘이 한몸이 되어야 날 수 있는 새)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자라는 나무)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DCN 전쟁사위원회 권순삼


우리궁궐 자료

  1. 창덕궁 1, 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1 ◈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조선 제3대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 향교동에 이궁離宮(별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405년(태종 5)에 완공하여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고, 1406년(태종 6)에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1411년(태종 11)에 금천교를, 그리고 1412년(태종 12)에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
    Date201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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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경복궁 끝

    조선의 궁궐, 경복궁 4 조선의 궁궐, 경복궁 1 조선의 궁궐, 경복궁 2 조선의 궁궐, 경복궁 3 ◈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연못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2층 규모의 기와지붕을 얹었다.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2층은 하나의 나무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향원정. 북악산이 보이고, 근래에 복원한 건청궁이 보인다. 동쪽에서 서쪽...
    Date201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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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경복궁 3

    조선의 궁궐, 경복궁 3 조선의 궁궐, 경복궁 1 조선의 궁궐, 경복궁 2 조선의 궁궐, 경복궁 4 ◈ 교태전交泰殿 및 아미산峨嵋山 굴뚝(보물 제811호) 강녕전 뒤에는 교태전이 있는데, 양의문兩儀門을 통해 교태전으로 들어간다. 양의는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이다. 둘이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궁궐 안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있다. 궁의 가장 중심에 있다 하여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왕비가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왕비의 고유 업무인 내명부內命...
    Date201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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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경복궁 2

    조선의 궁궐, 경복궁 2 조선의 궁궐, 경복궁 1 조선의 궁궐, 경복궁 3 조선의 궁궐, 경복궁 4 사정전 좌우에는 동궁과 경회루가 있다. 사정전 뒤에는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사적 공간이 있다. 경복궁의 배치는 사정전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배치된 사정전과 근정전은 공적 영역이고, 사정전 뒤에 배치되어 있는 강녕전과 교태전은 사적 영역이다. 왕과 왕비의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동궁과 경회루를 둘러보고 강녕전으로 간다. 먼저 경회루를 보고 동궁으로 간다. ◈ 경회루慶會樓(국보 ...
    Date201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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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조선의 궁궐, 경복궁 1

    조선 500년의 시작, 경복궁 1 -태조 이성계, 이곳에서 조선의 역사를 열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군자의 만년, 빛나는 복을 빈다'는 뜻을 담았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2년(태조 1년) 개경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2년 후인 1394년(태조 3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경복궁을 세웠다. 그 후 경복궁은 조선 500년 역사의 중심에서 한반도의 흥망성쇠를 지켜 보았다. 경복궁은 네모 반듯한 터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는 북한산 줄기인 백악산(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우에 낙산과 인왕산이 경복궁 터를 감싸주고 있으며, 남쪽...
    Date201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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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화청궁(중국 역대 황제들의 행궁)

    주 유왕과 포사, 그리고 당 현종과 양귀비 -3,000년의 역사, 역대 황제들의 행궁, 화청궁- 화청궁(지)華淸宮(池)은 당唐 제국의 제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당대의 이백李白과 백거이白居易가 시로 표현한 이후, 사랑에 대한 연민과 연인에 대한 낭만적인 장소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제2의 황궁(행궁)이자 절세미인들과의 놀이터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결코 낭만적인 장소는 아니다. 주周 유왕幽王(BC781-771)은 이곳에 여궁驪宮...
    Date20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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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아방궁阿房宮

    진시황제의 황궁, 아방궁阿房宮 BC210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도 영원불사를 누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전국시대(BC403-BC221)를 마감한 진시황은 9년 후인 BC212년에 자신의 황궁인 아방궁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3년 후인 BC210년에 전국 순행길에 올랐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영역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평원진平原津(현재의 산동성 평원현 동남, 지도에서 임치 서북)에서 병을 얻어 사구沙丘(현재의 하북성 광종현, 지도에서 한단 동북)에서 5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순행길에는 천하통일을 이루는...
    Date201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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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최종편] 중국 장안성 4

    장안성 Ⅳ 서안 장안성 Ⅰ(서안 위치도, 서안 주변 지도, 장안성 지도) 서안 장안성 Ⅱ(장안성 동문과 동벽) 서안 장안성 Ⅲ(장안성 북문) ◆ 서문 서문西門은 본래 당대 황성 서쪽의 중문이었다. 당말 한건韓建이 장안성을 축소할 때 남아 있다가 명대 성벽을 확대할 때 남쪽으로 이동하여 안정문安定門이라 하고, 실크로드로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옥상문玉祥門은 1926년 군벌 유진화劉鎭華가 서안성을 8개월이나 포위하여 서안 인민의 4만 여명이 동사·아사·전사할 때, 풍옥상馮玉祥 장군이 국민 연합...
    Date201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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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제3편] 장안성 3

    장안성 Ⅲ 장안성 Ⅰ(서안 위치도, 주변 관광지도, 장안성 배치도) 장안성 Ⅱ(장안성 동문, 동벽에서 북쪽 동벽 끝까지) ◆ 동벽 북쪽 끝 각루에서 북문까지 [사진설명_위에서부터]동벽 북쪽 끝 각루(북벽 시작점). 북벽 서쪽에서 동쪽으로 각루를 바라본 전경. 북벽 서쪽에서 동벽 성 안을 바라본 성곽. 북벽 서쪽에서 동벽 외벽을 바라본 전경. [사진설명_위에서부터]각루에서 북벽 서쪽 안벽을 바라본 전경. 외벽을 바라본 전경 [사진설명_위에서부터]북문을 향하는 성벽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적루의 모습. 적루 오른쪽...
    Date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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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제2편] 중국 장안성 2

    장안성 Ⅱ -동문에서 동벽 북쪽 끝 각루까지 서안과 장안성 Ⅰ(서안 위치도, 서안 주변 지도, 장안성 배치도) 동문에서 북문까지 약 3.5km, 왕복 7km는 걸으면서 사진을 담았고, 남문과 남벽은 차로 이동하면서 사진을 담았다. 그러나 서문과 서벽은 사진을 담지 못했지만, 모양은 비슷하다. 동서남북 순으로 사진을 올린다. 동문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동문(바깥쪽부터 정루(성루), 적루, 전루) 성벽의 동서남북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스스로의 용도가 달랐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
    Date201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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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제1편] 중국 섬서성 서안, 장안성

    중국 13왕조의 도읍지, 서안西安과 장안성 Ⅰ -중국을 아는가! 서안이 바로 중국의 원류다! -하나의 왕조가 쓰러진 자리에 다시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 역사의 퇴적물이 13번이나 계속되었다! 2010년 12월 7일, 4박 5일 여정으로 중국 서안을 다녀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안국제공항까지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1,861km, 서울에서 부산까지 2번을 왕복해야 하는 거리다. 비행코스는 인천, 중국 산동반도의 위해, 천진, 북경을 통과하여 보정, 태원을 경유한 다음 서안에 이른다. 서안국제공항은 서안시 서쪽 함양시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Date201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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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숭례문의 모형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한국고건축박물관에 있다

    Date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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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서울성곽(도성)_광희문光熙門

    광희문光熙門 ◈ 도성(서울 성곽) 지도 ☞ 도성(서울 성곽) ◈ 광희문光熙門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작은 문 4개(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으로 물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며,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을 내보냈기 때문에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한다. 시구문은 동문과 남문 사이의 광희문 외에 서문과 남문 사이의 서소문이 있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것이다. 이 해는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했던 두...
    Date20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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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국가 경영의 실패, 선조와 고종의 비참함, 덕수궁(경운궁)

    국가 경영의 실패, 선조와 고종의 비참함, 덕수궁(경운궁) -1592년, 국방을 등한시 한 결과, 선조는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임시 행궁으로 삼았다! -1907년, 개방을 등한시 한 결과, 고종은 순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 서울성곽(도성)과 궁궐 안내도 명 칭 창 건 중 건 비 고 경복궁 1395.9.29(태조 4년) 1867.11.16(고종 4) 경복궁 역사 창덕궁 1405(태종 5년) 1610년(광해 2년) 창덕궁 역사 창경궁 1418. 11. 3(세종 즉위년...
    Date20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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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구려 궁궐 국내성

    고사(古史)에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이다. AD 3년(유리왕 22)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 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 국내성이라고 보고 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지안현 서북쪽 2.5km 지점에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 위나암성)이 있는데,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Date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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