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6 19:43
- 치욕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우리의 가슴으로 끌어안을 때 선진강국이 될 수 있다!
서울 삼전도비 앞면과 뒷면에 만주어와 중국어로 적혀져 있는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 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 조선왕조 500년을 가진 나라, 하나의 국가가 500년을 지속시켜 온 나라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내외적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분명 500년의 역사를 지속시켜 온 근원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게 마련이다. 영광의 시간 뒤에는 치욕의 역사가 있게 되고, 그 치욕이 끝이 나면 다시 영광의 역사가 지속된다. 그러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회전한다. 영광의 역사만 기억하고 치욕의 역사는 버리게 되는 경우,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 그 시대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치욕의 역사, 그 역사를 우리는 끌어안아야 한다.
조선 제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정치 및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반정을 일으켜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인조 즉위 5년 후인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여진족, 누르하치는 1616년에 후금이라 칭하고, 누르하치가 1626년에 죽고 여덟째 아들인 황태극이 이어받아 1636년 4월에 황제라 칭하고 대청으로 국호를 고침)의 공격을 받았다. 정묘호란이다. 1627년 1월, 황태극(홍타이지)(재위 1626-1643)은 사촌인 아민(누르하치 조카)에게 3만 병력을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평양 남단에 위치한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의 총사령관 장만은 패배를 거듭한 뒤 개성으로 물러나 있었다. 인조와 조선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신해 있었다. 동년 3월에 화친을 맺고 후금은 퇴각했다. 10년 후인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태종(홍타이지)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9일 압록강을 건넜다. 임경업 장군이 의주 백마산성에서 방어하고 있었지만, 선발부대는 배후에 의주를 남겨두고 한성으로 진격하였다. 조선 조정은 13일에 침입 보고를 받고 왕실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그런데 청군은 14일에 개성에 도착해 있었다. 인조는 14일 밤에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청군이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서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6일, 청나라 선봉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이듬해인 1637년 1월 1일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성남시를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흘러 잠실로 흘러드는 하천)에 도착하여 20만 청군을 집결시켜 완전히 포위했다. 남한산성 내에는 군사 1만 3천명이 먹을 군량이 절약해도 약 50일분 밖에 없고, 지원군 역시 기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 등 500명을 이끌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항복을 받아들이는 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비석은 3년 후인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비석은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이 비석은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로 장식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내용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 행위를 공덕으로 찬미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고종 32)에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세웠다.
이 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 지었다.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이 비는 당초 한강변 나루터 인근에 세워졌으나,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수난과 수차례 이전 설치를 거듭해 왔다. 1980년대 송파대로 확장시 석촌동 289-3 주택가 공원에 세워져 있던 비를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심의를 거쳐 이곳 잠실동 47 위치로 이전 설치하게 되었다.
석촌호수 사거리에서 본 롯데호텔월드. 서울 삼전도비는 송파구 석촌호수의 서호(서편 호수)에 있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송파구청역) 3번 출구에는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롯데호텔월드가 있다. 3번 출구로 나와 롯데호텔월드를 우측으로 두고 대로를 따라 약 200m 걸어오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석촌호수 사거리다. 횡단보도 건너편 숲속을 보면 삼전도비가 보인다.
삼전도비 앞에서 본 롯데호텔월드.
삼전도비의 정면, 측면, 후면의 모습.
삼전도비의 귀부. 비신이 없는 귀부의 유래(안내문에 있는 글,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요구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정황을 근거로 청의 강요에 의해 귀부가 새로 제작된 것이라고 문헌사료를 통해 검토하여 기록한다).
삼전도비 앞면. 만주어로 적혀 있다.
삼전도비 뒷면. 중국어(한자)로 적혀져 있다.
삼전도비 측면의 용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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