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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정공 강사상 묘역에는 강홍립 도원수의 묘가 애처로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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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정공 강사상 묘역


이 묘역은 조선 중기 문신 강사상(1519-1581)과 그의 부인 파평 윤씨의 합장묘가 있는 묘역이다.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를 비롯하여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호석과 장명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강사상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상지이며, 호는 월포다. 1543년(중종 38)에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도승지(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 경상도관찰사(현재의 도지사), 대사헌, 이조판서(현 행정안전부 장관), 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 형조판서(현 법무부 장관), 병조판서(현 국방부 장관)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578년(선조 11)에는 우의정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정이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쪽의 비각 안에 있다. 이 비는 1713년(숙종 39)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권유가 지었고, 글씨는 홍문관 교리 이진검이 썼으며, 전액은 사헌부 대사헌 권규가 썼다. 


한편 이곳에는 광해군 때 5도 도원수를 지내면서 후금군을 공격하기 위해 명국에 파병되었던 강홍립 장군(1560-1627)의 묘를 비롯한 진주 강씨의 묘역이 있어 조선시대 묘제와 석물의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강홍립 장군의 시조는 고구려 시대의 명장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이며, 현조는 고려시대의 명장 강민첨 장군이다. 그 이후 진주 강씨는 9개 분파로 갈라졌는데, 강홍립 장군의 할아버지(조부) 강사상姜士尙은 통계공파通溪公派에 속한다.  

강사상의 아버지는 강온姜溫이다. 강온은 1519년(중종14)에 생원시生員試에서 급제한 후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현재 행정안전부 인사실무담당관에 해당, 정6품)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연산군 어머니 윤씨의 복위 문제) 때 할아버지가 폐비윤씨의 신위를 입묘入廟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처형 당하고, 아버지마저 처형을 당하자 한성을 떠나 경북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로 이거하였다. 


강사상은 명나라에 두 번 다녀왔다. 1562년(명종 17) 대사헌大司憲이 된 해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에 다녀왔고, 1570년(선조 3)에 주청사奏請使로 김귀영과 함께 명에 다녀왔다.   


강사상은 강서, 강신, 강인, 강담 4형제를 두었다. 이 중 강신(1543-1615)과 강인(1555-1634)이 뛰어났다. 강신은 선조 때인 1589년 정여립옥사 사건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오르고 진흥군眞興君에 봉해졌다.임진왜란 중에 함경도 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602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기로소老所(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 한다.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공서)에 들었다. 강인은 추천에 의해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 공조 좌랑이 되었다. 이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다. 이로 인해 아버지 강사상은 영의정으로 추증되기에 이르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회답사回答使로서 적진을 내왕하며 적정敵情을 탐색해오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의 역사에서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이 있다. 강홍립은 진흥군 강신의 아들이며, 진창군 강인의 조카이다. 강홍립은 1619년 후금을 치기 위해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 파병군으로 후금으로 진공했던 인물이다. 그 당시 직책은 5도 도원수이다(여기서 5도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를 말함). 5도 도원수는 5도에 주둔한 병력에 대해 사령권을 가지고 있는 직책이다. 강홍립은 문신이었고, 문장과 언어에 능통해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1605년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이 되었고, 1608년에 진주사陳奏使 이덕형, 부사 황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강홍립은 7년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올라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 까지는 행정 능력을 배양하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세자를 교육시키는 시강원에도 있었고, 탁월한 문장력과 언어 능력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이후 강홍립은 무관직을 수행하는 관직을 맡았다. 1609년 함경남도 병마사, 1611년 수원부사겸 방어사, 1614년 함경도 순검사를 지냈다. 이 시기 여진족 토벌 전략을 세워 무관으로서의 능력이 탁월함을 입증하였다.


현재 강홍립이 5도 도원수로 후금을 치기 위해 파견된 여러 이유 중에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문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이유다. 결정적 이유는 후금군과 전장에서 맞딱뜨렸을 때, 후금군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폐위 및 파병에 대한 광해군의 입장, 그리고 '형세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라'는 밀지 등등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강홍립을 전장에 노련한 사령관이 아니라 언어능력에 노련한 문장가와 통역가로 전락시키고 있다. 1만 3천을 파병할 당시 통역가는 문헌상에 나오는 인원만 4명이었다. 그리고 강홍립은 광해군을 즉위하게 만든 공신 중 한명이었으며, 7년 전쟁을 극복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이항복과 이덕형(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져 있음) 역시 광해군을 옹호했다. 강홍립은 이항복, 이덕형과 많은 친분이 있었다. 이 둘이 강홍립을 관직에 추천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후에 대북파의 영수가 되는 이이첨과 정인홍 등에 의해 이항복과 이덕형이 권력에서 밀려나 허망하게 죽게 되고 난 이후, 그리고 1619년 파병 당시 강홍립의 항복에 대해 광해군과 강홍립을 싸잡아 매도하는 사태가 대북파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 '형세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라'는 것은 '밀지'라기 보다, 파병을 떠나기 전 강홍립과 광해군이 나눈 대화에서 나온 것이고, 이러한 문구는 비변사 역시 전장에 나가는 사령관이 취해야 할 덕목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일기(광해127권, 10년) 1618년 윤4월29일 기록에 보면, 명나라 파병 요청에 대해 비변사와 광해군이 나눈 대화 내용 중에서 광해군이 비변사에게 말한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사이트 번역은 '...먼저 수천 명의 군사를 정비해서 천조天朝를 위해 의주 등 지역에서 변을 대비하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진퇴하며 지휘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 이 원문은 '...先整數千軍兵, 爲天朝待變于義州等處, 隨機遲退, 以聽調用, 似爲合宜...'이다. '상황에 따라 진퇴하다'는 '수기지퇴隨機遲退'다. '진퇴'라는 말은 없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퇴각을 더디게 하면' 명군 파병 요청에 대한 명분도 되고, 후금군에 대한 무력 시위도 가능하다는 2중의 포석이 깔려 있다. 이러한 것이 즉각적이고 집중적인 파병을 원했던 중신들에게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장에서 전쟁에 임하는 탁월한 장군이자 전략가라면, 목숨을 다해 전투를 펼치고 중과부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부하들을 생환시키기 위해 항복을 하는 것이 의미없이 죽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1619년 3월 1일~4일에 걸쳐 일어났던 전장 상황을 살펴보면, '밀지', '거짓 투항' 등과 같은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떤 사건의 요인을 기술할 때, 몇 가지를 나열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위쪽에 기술하고, 제일 낮게 생각되어지는 요인은 뒤에 기술한다. 광해군이 폐위될 때, 인목대비가 폐위에 대한 이유를 나열할 때, 광해군의 대외정책 및 강홍립의 패전에 대한 광해군의 실책에 대해서는 제일 마지막에 기술하고 있다. 


인조실록(인조 1년) 1623년 3월 14일 광해군 폐위에 대한 인목대비(왕대비)의 교서 내용을 보면,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이 원문은 '...己未征虜之役, 密敎帥臣, 觀變向背, 卒致全師投虜, 流醜四海...'이다. 이 내용이 그 어떤 기록보다 신빈성이 높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교서에서도 '밀지'는 없고, '밀교'이다. 그런데 이 '밀교'라는 것도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민환은 도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비밀 문서도 열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홍립이 1619년 후금군을 치기 위해 5도 도원수로 임명된 것은 전쟁과 전략이라는 본인의 이력 때문이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했지만, 인조 역시 강홍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광해군 집권기에는 이항복 및 이덕형과 대척점에 서 있던 대북파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어졌고, 인조의 집권기에는 대북파의 대척점에 있던 인조반정의 주역들에 의해 또 한번 갈기갈기 찢어졌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이덕형 및 이항복을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 시기는 이미 후금을 철저히 배격하는 상황이 되었다. 광해군 일기를 읽어보면, 광해군은 명에 대하여 감정은 좋지 않았지만, 절대로 명나라에 대해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광해군이 파병을 미룬 것은 패배에 대한 확실성 및 국내 군사력 수준 등을 감안해서이다. 광해군이 국방력 강화 대신에 궁궐 수축에 따른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고, 형제 및 친인척 살해, 그리고 여러 가지 정책의 실패 등으로 폐위된 것은 맞지만,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광해군은 비판받아야 하고, 폐위에 대한 동정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밀지'와 '거짓 파병 및 항복' 운운하는 것은 강홍립 장군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고가 버린다.     


강홍립의 집안은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조선 및 왕실에 충성스러운 집안이었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라고 관직생활을 한 강홍립의 당당함은 1619년 3월, 후금군에 투항한 이후 1627년 귀환할 때까지 후금의 누르하치에 대한 태도에서 여설히 나타난다. 강홍립의 당당함과 조선인으로서의 기개는 강홍립의 종사관이었던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1620년 7월 20일, 이민환은 조선으로 귀환하고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이하 10여인은 후금에 포로로 남아 있었다. 파병이 이루어진 1618년 7월부터 책중일록이 시작되고, 1620년 7월 20일에 책중일록은 끝이 난다. 항복한 이후부터 1년 4개월만 강홍립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지만, 이로 미루어 그 이후의 일도 당당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 강홍립의 집안 사람 중에 인조 때 일본에 다녀와서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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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상 묘역 제일 위쪽에서 본 강사상 묘역 전체 전경. 좌측 하단 수림이 울창한 곳에 쌍분이 있다. 강사상의 묘다. 우측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는데, 나무의 바로 좌측 석물이 여러 개 있다. 이 무덤이 강사상의 아들인 강인의 묘다. 강인은 7년 전쟁 당시 선조를 호종하였기에 1604년에 공신 중 최고 반열인 호종공신에 올랐다. 이 때문에 작고하신 아버지 강사상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인은 또한 광해군이 잠저 때 사부였다. 나무 한 그루 하단에 축대를 쌓아올린 곳이 보인다. 석물이 1-2개 정도 보인다. 강홍립의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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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공 강사상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4호, 관악구 신림동 산 107번지 2호). 현재 난곡로 11길 난향 새마을금고 뒷편. 마을길이 좁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다. 난우중학교를 찾고 맞은 편을 찾으면 된다. 묘역 관리인 2명이 있다 하는데, 연락처가 없으므로 안으로는 여간해서 들어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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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초입에서 본 강사상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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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과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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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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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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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및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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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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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아래(묘역 제일 하단)와 위에서 묘역 위쪽으로 본 강사상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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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제일 하단에서 맞은편 난우중학교를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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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상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석물 중에는 동자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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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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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강홍립의 묘. 문신상 1개. 망주석 1개. 상석 1개가 설치되어 있다. 패자는 말이 없다. 정치인(문신)에 의해 희생된 장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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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공신 진창군 강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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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 정면, 후면에서 본 강사상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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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제일 상단에서 난향동 휴먼시아 단지 및 관악산 서쪽 끝자락 호암산을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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