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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시래.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
8월 18일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 사쿄구에 있는 작은 절 ‘적산선원’.

외진 곳인데다 날씨도 무더웠지만 꽤 많은 사람이 참배를 하느라 붐볐다. 교토에는 ‘7대 복신(七福神)’을 모신 절과 신사가 있어 이곳을 모두 둘러보면 복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 절도 그중 한 개다. 그런데 이곳에 모신 신은 재물신인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이다. 유난히 상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토바라이 상관행도 이곳에서 나왔다. 본래 매달 5일을 뜻하는 이쓰카바라이에서 출발해 차츰 5·10·15일 등을 포함하는 고토바라이 전통으로 이어졌다. 교토에서 3대째 건재회사를 운영하는 이나가키 도시히코는 “예전부터 매달 5일에 거래 대금을 정산하는 관행을 지금도 지켜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절의 주지 에나미 슌쇼(叡南俊照)는 “일본인들도 기원을 잘 모르는 이 상관습의 출발점은 적산선원”이라며 “‘매달 5일 적산대명신의 제일(祭日·기념일)에 절을 참배하면 사업이 번창하고 외상값 수금이 잘된다는 속설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일본인 생활 깊숙이 흔적을 남긴 재물신인 적산대명신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놀랍게도 신라인 장보고가 튀어 나온다. 역사학자들은 ‘적산대명신=신라명신=장보고’라는 등식으로 설명한다.

◆적산대명신과 장보고 연결고리=적산대명신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교토 북쪽 히에이산에 있는 일본 천태종 본산 엔랴쿠지(延曆寺)를 찾아가야 한다. 이 절은 천태종을 세운 사이초가 만들었고, 3대 좌주(교단의 수장) 엔닌이 교세를 확장시킨 곳이다. 일본 고승인 엔닌은 중국에서 신라명신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의 작은 사당 적산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엔닌은 입당 유학할 때 중국의 적산에서 신라명신을 불법연구의 수호신으로 모시고…그 공덕으로 10년간의 수행이 무사히 끝나게 되어…’.

엔닌은 죽기 전 제자들에게 적산궁과 별도로 신라명신을 모실 절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자들은 그가 죽은 지 24년 만인 888년에 신라명신을 위한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적산선원이다.

엔닌이 모시라고 했던 신라명신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목포대 강봉룡(역사학) 교수는 “적산대명신, 즉 신라명신이 장보고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은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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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물신이 된 신라인=장보고는 신라에서 성이 없었다. 어려서 활을 잘 쏜다 해서 궁복(弓福)·궁파(弓巴)로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중국에서 쓴 한자 ‘張保皐’로 표기했다.

학자들은 신라에서는 평민으로 성이 없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성이 필요하자 활 궁(弓)자를 부수로 단 장(張)씨 성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자신의 이름 ‘복’ ‘파’를 중국 발음으로 풀면서 ‘보고’로 짓되, 군인으로서 활동했으니 보호할 보(保)를 썼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일본 사서(속일본후기)는 장보고의 한자 이름에 보물(寶)자를 써 ‘張寶高’로 표기했다.

어째서 한자 표기가 바뀌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역사 자료는 없다. 숭실대 김문경(역사학) 명예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장보고가 거상이요, 거부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장보고와 거래하면 부자 돼=장보고 선단이 일본을 오간 기록은 수없이 많다. 현지 귀족들은 장보고 선단이 가져오는 신라·당·서역의 물건을 좋아했다. 고위관리들은 앞다퉈 장보고와 거래했고, 이권을 둘러싸고 다투기도 했다. 장보고 선단이 교역을 했던 후쿠오카(당시 지쿠젠국) 태수였던 훈야 미야다마로는 자리에서 물러난 뒤 본가가 있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장보고와 거래를 했을 정도다. 그는 842년 장보고의 암살 소식이 전해진 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이충(장보고 부하)의 화물을 빼앗으려 했다. 물건을 받기 위해 미리 비단을 건넸는데, 장보고가 죽었으니 대신 화물을 차압하겠다는 것이었다. 현물거래가 원칙이던 당시 이례적인 ‘신용거래’를 한 흔적이다. 계명대 국제학대학 이병로(일본학) 교수는 “훈야는 나중에 모반사건에 몰렸는데 장보고와 거래 이권을 둘러싼 귀족들의 암투 결과라는 학설이 있다”며 “이 사건은 중앙정부가 관련된 것이라 당시 장보고의 네트워크가 교토의 조정까지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 ▶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 ▶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 사진=교토(일본)=안성식 기자

▶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srkim@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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