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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Mar
한강의 전차전한강의 전차전
한국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한미 연합군은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후에 전차 53량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그러나 미 해군의 콜세어 전투기가 하늘에서 마구
설쳐대며 대지 공격을 해대니 주간에는 꼼짝을 못하고
야간에만 공격을 시도하다가 미 해병 전차들의 반격과 보병들의
3.5인치 로케트 포에 의해서 맥을 못 추고 격파되었다.

M26 퍼싱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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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반도와 김포 비행장을 탈환하자 미 해병대는 인천에서부터
가져온 LVT를 그대로 타고 행주 나루를 건너 한강 북쪽에 진입했다.
영등포를 점령하자 이제 강남의 적은 거의 분쇄했다고 판단했던
미군은 서빙고와 보광동으로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마포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LVT로 감행한 행주 나루 상륙작전은
다음을 클릭-> 또 하나의 인천 상륙 작전 click ]
미군들은 서울 근교로 밀고 들어와서 9월 25일부터 서울 시내
진입 작전을 개시하였다.
서울 시내 진입 전 미군을 저지 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한
북한군으로서 기대 할 바는 시가전 밖에 없었다.

T3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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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전차라는 것이 인구와 건물 밀집의 시내에 들어서면 사방으로부터
전차 특공과 직사화기로부터 노출 되는 약체라는 것을 군사 상식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북한군은 서울 시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미 해병 전차의
진입 예상로에 수 백 미터 씩의 간격을 두고 흙 가마니와 여러 가지
장애물로 높이가 3미터에 폭이 2미터가 넘는 토벽을 쌓고
이 토벽 주변에 대 전차 지뢰를 설치했다.
그리고 주변 빌딩에는 어김없이 보병들과 전차 특공조, 그리고
구식이 다 된 것이지만 소련제 14.5밀리의 대전차 총을 거치하였다.
이 전근대적인 총은 시내로 진입할 미 해병 M26의
광학장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로 이 총기에 당한 미군 전차들이 있었다.]

14.5mm 반탱크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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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흙 가마니 바리케이트가 얼마나 많았던지 미 해병들은
서울 진입 작전을 바리케이트 전투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북한군은 이제 서울은 한미 해병대의 무덤이 될 만 한 함정이
되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북한군은 그 두 달 반전에 전차 일개 연대 30여량을 대전 시가에
보병 호위 없이 단독 투입해서 미군을 붕괴시키고 대전에서 쫓아내는
목적을 이루었으나 그 절반이나 되는 전차를 미군들의 3.5인치
로케트 포와 항공 공격에 손실당했었다.
최근 체첸 공화국의 그로즈니 시가지에 보병 호위없이
뛰어 들었던 러시아 전차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역사적 사실도 있다.
그러나 미 해병대의 서울 진입 작전, 즉 서울 시가전은 시가전의
전술학 야전 교범을 옮긴 듯이 완벽한 것이었다.
9월 25일 아침 7시에 시작했던 시가지 작전에서 선두에 선 것은
전차대가 아니라 보병들이었다.
보병들은 전차 전면에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측면과 후면에서
전차를 에워싸고 극히 조심스럽게 전진해갔다.
다른 말로 말하면 보병이 전투를 담당하고 전차가 화력을 담당하는
역할 분담으로서 서로를 방어하며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해병 전차들은 엄청난 양의 기관 총탄을 바리케이트 주변의
의심 건물이나 적군 은신 예상 지역에 퍼부었다.
이것은 수색 사격이라고 하는데 이 수색 사격의 탄막에 걸리면
잠복했던 적군은 도주하거나 조급한 사격으로 존재를 들어내고 만다.
이 수색 사격은 독일의 장군 롬멜이 적극 권장했었고
옛 한국 기갑부대에서도 ATT라는 전술 훈련을 하면서 항상
강조하던 것이었다.
전차포는 물론 포와 같이 장착된 공축 기관총은
원거리 목표를 사격 했고 근거리의 의심 목표는 조종수 옆 좌석의
전방 사수가 휘둘러 쏘는 전방 기관총의 기관총탄을 흠씬 얻어맞았다.
[M48 탱크부터 전방 사수석은 없어졌다.]
별다른 조준 장치가 없이 예광탄의 비행만 보고 대강 짐작하고
쏴 대서 평소 전차병들이 그 전투 효율성을 의심하던 전방 기관총은
서울 진입 작전에서도 예외적인 대활약을 해냈다.
지금까지 서울 시내에서 낡은 건물의 서쪽이나 남쪽 벽에 기관총탄의
탄흔이 남아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미 해병대
전차에서 발사 한 것이다.
바리케이트마다 주변 의심 지점은 전차 화력의 소낙비를
뿌려대고 보병이 나서서 역시 막강한 추가 화력을 추가로 퍼부어
적을 소탕하면 공병이 나서서 대전차 지뢰를 제거하고 흙 가마니의
토벽을 부수어서 전차의 진로를 텄다.
해병들은 바리케이트마다 이런 세심한 주의를 했기 때문에
토벽 바리케이트 하나 통과 하는데 평균 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진격을 하다 보니 서울을 완전 수복하는데
9월 28일까지 사흘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바리케이트가 별 역할을 못하자 공산군들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서울 동북방을 통해 의정부 쪽으로 도주했다.
북한이 서울 시가지 전투에 투입했던 전차 특공조의 활동은
절망적인 한국군이 전쟁 초기 북한군 전차에게
가했던 대 전차 특공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들이 특공으로 파괴한 것은 단지 미 해병 화염 방사 전차
한량뿐이었다.
전차의 미 해병 승무원들은 탈출했고 북한 특공병은 사살 당했다.
이 전차 한량이 미군이 서울 시가지 공략에서 북한군에게 잃은
유일한 전차였다.
북한군의 전차 특공조가 맥을 못쓸만큼 미 해병 보전 전투단은
시가지에 숨어있던 북한군들에게 빈틈을 보이지를 않았다.
해병대 전차대의 서울 진입 작전에서 전사에 남길 완벽한 시가전의
모범을 보인것 외에 해병대의 전차들이 서울시에 진입전인 9월22일
노량진 수원지 근처의 미 해병대 전차들과 강 건너 용산역 구내에
잠복해 있었던 북한군 전차 소대끼리의 장거리 전차전도 여기서
분석해 볼 만하다.
1950년 9월 22일 영등포 방면에서 더욱 진격한 미 제 1 해병 연대는
한강 철교 둑 근처에서 아직 한강 북쪽으로 퇴각하지 못한 T34전차
4량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한강둑에서 북쪽을 살펴본 미 전차대는 강북의 터널 모양의
철로 정비창에 서너 량의 T34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철도 역은 항상 전투 지역의 중요한 전술목표라서 북한군은
역시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형지물인 한강교에 가까운 이곳에
대전차 전투력을 배치했던듯하다.
[나의 군 시절 서울 북방 전차 방어선을 점검하다가 전쟁이 터지면
국군 기갑 부대의 최후 방어선이 될 수색역을 방문했을 때
역의 남단에 한국 전쟁 때 미군들이 만들어 놓은 낡은 전차호가
그 때까지 남아있던 것을 보고 감탄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T34들은 지금 용산역에 있었던 철로 정비창 자리의 콘크리트
터널에 항공 공격을 피해 숨어 있다가 들킨 것이다.
미 해병의 선제 포격으로 적의 전차들과 포격전이 붙었다.
양쪽의 전차들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화력을 주고받았다.
포성이 조용한 한강의 강 수면을 연속으로 휩쓸었다.
북한군의 전차들만 응사한 것이 아니었다.
한강 다리 주변과 철도 정비창에 교묘히 은폐되어 있었던
사단포라 부르는 북한군의 76미리 대전차포도 포문을 열었다.
커티스 중위가 지휘하는 미 해병 M26전차의 90밀리 전차 포탄
한 발이 강 건너 목표 전차에 명중되자 포탄의 유폭으로 T34전차의
포탑이 날아가 버렸다.
T34전차들은 생쥐처럼 콘크리트 터널 속을 들락거리며
저항했으나 모두 격파 되어 버렸다.

북쪽에서 한강철교에 진입했던 순간에 본 한강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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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차전에서 미군은 북한군 T34 3량을
대파 시켰고 이어서 계속 연타로 해댄 전차포 사격으로 주변의
적 대전차포 6문을 모두 파괴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T34가 터널을 은신처를 들락거리며
싸웠다는 곳이 용산역의 정비창이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은 물론 빽빽이 들어선 빌딩들 때문에 양 전차들이 전개했던
장소는 서로 상호 시계가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이
T34가 숨어있었던 용산역 구내 콘크리트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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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시대에 거리가 그렇게 멀고 중간에 한강 둑 같은 것도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좀체 위의 전차전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주말 직접 전철을 타고 노량진과 용산역 사이를 오고 가며
과연 이 공간이 전차전을 할 거리이며 서로가 상대를 볼 수가 있는
시계 안에 있는지를 확인 해보았다.
그러나 오고가고 하면서 살펴보니 용산역의 과거 정비창이 있던 곳의
지대가 의외로 낮았다.
옛날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낮은 구릉사이에 있는 전답지대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1925년 을축 년에 한강이 넘쳐흐르는 대형 홍수가 있을 때 한강물이
서울역까지 밀려갔었던 사건이 생각났다.
지금으로서 믿기가 힘든 일이었지만 지형을 보니 그런 천재지변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다리 남단 의 약간 높은 지대에서 이곳이 잘 보일것으로
판단이 섰다.
지도를 찾아 미 해병 전차가 있던 곳과 북한군
T34가 있던 곳과의 거리를 자로 재보니 3,500미터 정도가 되었다.
비록 전차포의 유효 사거리가 5,000 미터라고 하나 3,500미터
정도의 거리는 이동 목표인 적 전차를 쏘기에 상당히 먼 거리였다.
사실 역사의 전차전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개가
2,000야드의 근거리 안에서 행해졌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 있었던 전차전의 평균 거리가
660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장거리 전차전에서 미군 전차 5량이 적 전차와 6문의
대 전차포가 합쳐진 9문의 대전차 화력을 극복하고 오히려 적 전차와
적 전차포를 남김없이 격멸했던 사실에 흥미가 가서 이 장거리
전차전을 분석 해봤다.

북한의 76미리 사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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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차전은 전술적인 기습을 한 것도 아니고 지형지물의
우세함에 크게 그 결과가 좌우 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포술만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먼저 76미리 포는 이런 원거리 전차전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무기였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그 포에서 발사하는 철갑탄은 이 정도의 원거리에서 M26의
두꺼운 전면 철갑을 뚫지를 못한다.
76미리 포탄의 관통력은 1,000미터에서 45미리 밖에 되지 않는다.
M26의 전차의 정면 장갑은 100미리였다.
더구나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76포의 명중률도 극히 떨어진다.
같은 포라도 전차 장착 포와 포가 장착 포의 명중율은 크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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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내가 기갑의 대 선배이신 원로 선배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분은 6.25사변 때 한국군이 전차대신 장비했었던 M36 90미리
자주포 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 때 한국군 기갑은 고지에서 싸우는 한국 보병을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였었다.

90미리 M36 . 전차 같이 보이지만 자주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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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상적인 사거리인 1,500미터 정도에 사격진지를 잡고
포격을 했었는데 적의 76미리포가 갱도에 숨어 있다가 틈을 보아서
순식간에 포신을 내밀고 두어 발 쏜 뒤에 다시 숨어버리는 바람에
장갑이 약한 M36이 피해를 본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후퇴해서 3,000야드 거리에 사격 진지를 잡고 지원을 했었다.
그랬더니 자신들의 주포인 90밀리 포는 그 장거리에서 적의
토치카나 갱도 입구나 밀집한 보병들을 명중시킴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다.
그러나 적의 76미리 포는 그 뒤에 30여 차례나 도둑 고양이 같은
포격을 했었지만 한 발도 자기 소대 전차를 명중시키지를 못했다라고
말했었다.
이 사실 하나로만 보아도 그날 한강 변의 북한군의 사단포들은
불가능했던 거리에서 쓸데없는 사격을 해서 자신들의 위치만
노출 시켰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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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별다를 경험도 없었던 적 사단포의 포수들이 전차가 쏘니까
같이 어울려 포문을 열었다가 별 성과는 못 보고 은폐도 안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적 전차부터 해치운 미 전차들에게 떼죽음을
한듯하다.
미군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은 먼저 한 발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던 북한군 전차 쪽의 문제에서부터 한 번 살펴보자.
첫째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미군 전차들과 한강을 두고 맞붙은
T34전차 85미리 포의 영점을 제대로 못 잡았거나
엉터리로 잡아 놓았을 가능성이다.
전차포도 소총과 같이 포탄의 탄착점과 조준경의 십자선이
일치 하도록 영점을 잡아놓고 포수들은 이를 항상 유지 하도록
노력을 한다. [자주 변한다.]
그러나 이 북한 전차들은 실전에 투입한지도 삼 개월이 되어서 미리
잡아 놓은 영점도 변화가 있을 듯하고 미군이 인천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받고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이 영점을 다시 확인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점 사격을 하려면 정확히 1,500야드 정도의 영점 사격을 할
사격장이 필요하며 영점을 잡기 위해서 최소한 9발의
포탄 사격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국 전쟁 초기 끊임없는 미군들의 폭격 속에서 북한군의
T34전차는 영점 사격을 한 번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영점 수정이 없으면 1,000야드 내외에서는 그럭저럭
비상 영점을 활용해서 전차포들을 사용 할 수 있지만 한강에서와
같은 장거리 포격전에서는 문제를 들어 낼 것이다.
두 번째로 가능성으로서는 북한군이 낡은 전차 포신의
적시 교체를 못했다는 가능성을 들어야겠다.
전차포는 포강(砲腔)의 마모가 심하다.
전차 포신의 생명은 일천 발 내외다.
크롬 도금이 포강 내부에 되어 있으나
수명이 다하면 여기 저기 깨진 곳이 보인다.
이 정도 되면 포신을 교체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전차마다
포 이력카드라는 것이 있어서 사격 후 꼼꼼히 기록하게 되어 있다.
수명이 다하면 교체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전쟁의 후반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대 원로 선배로부터
전투가 심할 때는 90미리 포신을 일주일이나 이주일 마다 한 번씩
교체해주었다는 말을 듣고도 좀체 실감이 가지 않았었다.
그렇게 포신의 마모가 심할 수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 했었는데
한 전투사를 읽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한국 전쟁 마지막 단계인 1953년 7월 24일 중공군은 마지막
공세를 가했다.
중공군 공격 목표중의 하나에 볼더 시티 고지라는
미군의 방어 고지가 중부 전선에 있었다.
중공군은 집중된 병력을 동원해서 이 고지를 마구 공격을 해댔다.
미군은 이에 M46 전차 30량을 동원해서 치열한 화력으로
이에 맞섰는데 하룻밤에 중공군에게 퍼부은 전차 포탄이
무려 4,845발이나 되었다.
전차 1량당 발사 탄수를 평균 내보니 하룻밤에 발사했던 전차
포탄만 160발이나 되었다. 심한 전투라면 열흘 사이에
1,000발 발사는 어렵지가 않을 듯하다.
이 전투는 나에게 들려준 선배의 말씀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하겠다.
북한군은 미군의 심한 폭격으로 보급에 대단한 제약을 받았으므로
제대로 포신을 교체했는가는 의문이다.
낡은 포신으로 포격을 하면 포탄은 명중은 커녕 제 멋대로 날아간다.
이런 포로는 그런 정교한 조준이 필요한 장거리 포사격전이
불가능하다.
세 번째로 가능했던 것은 북한 전차가 포격을 해서 미군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철갑탄이 이 장거리에서 미군 전차의
정면 장갑을 뚫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포탄이라는 것은 발사되고 나면 점점 속도를 잃으면서
관통력도 잃는다.
순전히 물리적 힘만 사용하는 철갑탄은 사거리가 3,000미터쯤 되면
정면 장갑에 대한 관통력이 거의 한계점에 달한다.
그러니까 85미리 탄이 명중했지만 탄이 관통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미 해병대 쪽을 보자
북한군이 가질 수 있었던 이 세 가지 문제점을 미해병대는
가지지 않았다고 본다.
북한군과는 반대로 해병대는 인천 상륙 작전 출발전 출발지인
일본에서 영점 사격도 충분히 했을 것이고 포신도 새것으로
교체해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 전차포에 맞은 북한 전차가 포탑이 날아갔다는
대목을 보자 .
사실 가공할 독일군의 88미리 포와 성능이 비슷한 미군의
90미리 포탄도 3,000미터 이상의 먼 사거리라면 피탄의 각도와
위치에 따라 적 T34전차의 전면 장갑의 관통에 한계가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이날 미군 전차대는 철갑탄을 쐈다고 썼다고 되어있지만
대전차 고폭탄[HEAT]을 쐈을 가능성이 있다.
대전차 고폭탄은 거리에 상관없이 적 전차에 맞으면 폭발하면서
고열을 내뿜어 적 전차의 장갑을 녹여 깨고 전차 내부로 고열을
뿜어 넣는 살상력을 발휘한다.
철갑탄을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고 해서 물리탄이라고 불리지만
대전차 고폭탄은 화학적인 힘을 사용한다고 해서 화학탄이라고 한다.
[대전차 고폭탄은 보병들이나 차량을 공격하는 고폭탄[HE]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대전차 고폭탄은 고열을 내므로 자주 명중된 전차에서 화재가
발생함은 물론 앞에서와 같이 내부 포탄들의 유폭[誘暴]을 발생시킨다.
위의 피탄 전차가 포탑이 날아갔다는 것은 철갑탄이 아니라
말한바대로 대전차 고폭탄이 사용 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준다.한국 참전 미군들은 철갑탄보다 대전차
고폭탄을 선호했었다.
단지 이 HEAT탄은 생김생김이 탄도 비행에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라서 장거리 명중력이 떨어진다.
해병 전차대가 북한군의 철갑탄과 같은 보통의 철갑탄이 아니라
탄속도 빠르고 관통력도 훨씬 좋은 고속 철갑탄이나
관제부 철갑탄이라는 신형 철갑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지금은 철갑탄들이 너무 발달해서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신빙성은 별로 없지만 한강을 사이에 두고 전차끼리의 또 다른
사격전이 3개월 뒤에 있었다고 전사는 전하고 있다.
1951년 일월 1.4후퇴 때다.
1950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영국군의 센투리온 전차대는
1.4후퇴로 전원 서울에서 후퇴 한 뒤에 서울로 침투시킨 정찰대를
한강 남안에서 엄호 중에 강북 둑에 나타난 역시 영국제 크롬웰
탱크를 포격해서 이를 파괴하였다.
이 크롬웰 탱크는 중공군이 철수하는 영국군이 북한 땅
에 버리고 온 것을 노획한 것으로 한강까지 중공군이 몰고 왔다가
파괴당한 것이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미 중고품이 되어서 영국군에서 퇴역 중이었다.
소수의 전차만 한국에 반입한 영국군이 왜 신식인 센투리온 전차
한 종으로 차종 단일화를 하지 않고 정비와 보급만 복잡해지게
구식이 다 된 크롬웰을 가지고 온 이유에 대해서 의심이 가고
다른 기록에 ‘확인 하기는 힘들지만 ’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소개된 점도 이 사실은 더욱 확인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58년전 전차전이 있었던 용산역 근처는 요 근래에 들어서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폭풍이 서너번이나 스쳐 갔다.
T34가 콘크리트 터널에 숨어서 숨바꼭질은 했던 곳이 200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비롯해서 초고층 빌딩 구역으로 재개발 된다고 한다.
덕분에 90미리와 85미리 포탄들이 교차로 지나간
지역의 24평의 아파트는 8억원의 엄청난 가격이 호가되고 있다.
한평이라도 돈 되는 물건을 사보겠다고 돈 보따리를 들고 왔다갔다하는
복 부인들을 보고 한국 전쟁 때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치의 땅을
두고 목숨을 걸었던 한미 양국의 젊은이 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