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1973년1월27일 미국은 베트남을 떠나기 위해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공으로 키신저와 레둑토 는 노벨상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지명되었다. 그러나 레둑토 는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전문만 보낸 채 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위선자인 키신저와는 다르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동양인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착한 아들을 육군에 보냈더니 미국이 그 아들을 '미라이 학살사건'의 살인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어느 미군병사 어머니의 울부짖음,
만삭의 몸으로 전사통보를 받아들고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오열하는 흑인 미망인,
"우리는 정치인들이 가라고 해서 갔고, 싸우라고 해서 싸웠고, 철수하라고 해서 철수했다."
케산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해병대령 데이비드 론스의 허탈한 독백,
두 다리를 베트남에서 잃어버린 참전용사가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다른 참전용사들을 보살피는 인간애, 베트남전에 얽힌 애환은 끝이 없었고 결국 마약과 반전데모로까지 이어졌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금괴 2톤을 가지고 조국을 등진다. 4월30일 사이공 마지막날,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베트남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부인만 옷 몇가지만 챙겨 보낸 후 그는 대사관을 지킨다.
포드 대통령이 헬리콥터 조종사를 통해 마틴대사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마틴 대사와 대사관의 성조기를 챙긴 2명의 해병 경비대원이 헬리콥터를 탔다. 그것이 30년 전쟁의 끝이었다.

베트남전쟁...
이 서글픈 전쟁의 성격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 (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는 여전히 사이공이라고 불렀지만, 지도에서는 그런 지명이 사라지고 '호치민 시' 가 되었다. 일평생 독립을 그렇게 갈망했던 호치민은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한 채 하노이 바딘 광장의 성묘에 명실상부한 국부로서 조용히 누워있었다. 보 구엔 지압 장군과 사이공 해방의 지휘자였던 반 티엔 등 장군은 소임을 마친 뒤 은퇴하여 시골에서 쉬기를 원했다. 그러나 조국 베트남은 두 사람의 경륜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통일된 지 2년 후인 1977년 9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이 유엔에 가입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가하였고 초대 유엔 대사가 된 하 반 라우는 "이 기간 동안 1,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최소한 각 가정마다 1명씩은 전사 아니면 부상당한 사람이 있었지요. 부상자들을 돌보고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련은 전후 복구를 위하여 30억 달러를 지원했고, 베트남은 100여 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미국만 유일하게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었기 때문에 하노이와의 관계 개선에 소흘했다.

새로운 인권 시대를 주창했던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중국이 캄보디아의 살육적인 크메르루주 정권을 지지하는 것에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유인즉 중국과의 관계 개선 이란 명분이었다.
1981년 봄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소련과 중국의 의미 없는 대리전에 빠져들었고, 동남아시아는 공산주의 두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25년 전에 베트남전의 드라마가 끝났어야 할 디엔비엔푸를 1979년 1월에 방문했다. 뒤틀어진 탱크, 녹쓴 대포가 생생한 교훈을 남기고 있었지만,안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낮게 걸려 있었다.
카트리 장군의 지휘 초소는 1954년 그가 떠날 때 남겨진 그대로였다. 승자의 환호와 패자의 한숨이 같이 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25년 동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계곡의 주인공들이었던 지압 장군은 당시 젊은 나이로 지휘를 했었고, 반 티엔 등 중위는 언덕배기를 수없이 오르내렸다. 불굴의 비제아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끝까지 유지했으나, 결국 포로가 되었다.
훗날 장군으로 진급한 후 프랑스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다.
품위를 지킨 군인 중의 군인 랑그레 대령은 장군으로 은퇴한 뒤 프랑스 농장에서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앙리 나바르 장군은 파리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며, 디엔비엔푸의 전설 즈느비에브 간호사는 의사와 결혼한 뒤 인자하고 품위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디엔비엔푸에서 중국이 캄보디아 전쟁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을 들어 베트남을 침략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하노이에서는 수천 년 동안 원수지간이었던중국을 비난하는 정치국원들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반 티엔 등 장군은 나에게 옷으면서 중국은 미국에 비하여 훨씬 가벼운 상대라고 말했다.

베트남 지도자들의 평균 연령은 거의 70세가 되었다. 그래서 몇 사람의 비판자들은 비타협적이며 나이 든 그들이 평화를 지킬 수 없거나, 아니면 평화를 지킬 생각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27년간 수상을 지낸 팜 반 동은 베트남 지역의 평화, 안전을 위해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 개선을 계속 추구하고 있었다. 일찌기 호치민이 식민주의를 배척하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절실하게 원했던 것처럼, 팜 반 동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사이공에서는 여전히 자리의 행상들이 리글리 껌, 윈스턴 담배, 청량음료 7-up을 팔고 있었으며, 피폐화된 하노이의 젊은이들은 10여 년 전의 사이공 젊은이들을 점차 닮아 가는 모습을 보였다.
트란 반 돈, 부이 디엠은 1975년 베트남을 떠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면서 플로리다, 워싱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았던 구엔 카오 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 마틴' 이란 가명으로 런던 외곽의 어마어마한 저택에 살며, 그곳을 '백악관' 이라 부르던 구엔 반 티우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끝내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
토스카나 농장에서 목장을 경영하겠다던 꿈을 버린 마틴 대사는 노스캐롤라이나를 선택했고, 로지는 가족들이 있는 매사추세츠의 비벌리로 돌아갔다.
워싱턴에 등지를 튼 데일러 장군은 분명한 태도로 전쟁을 이렇게 후회하고 있었다.
"우리는 남베트남을 필두로 우리의 동맹국들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두번째로 우리의 적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고요. 마지막으로 변명할 수 없는 실수는 미국 국민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벙커 대사 또한 "뒤늦게 생각해 보면 누구든지 개입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감회를 털어놓았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주역이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 선거에서 실패했으며, 전형적인 군인으로 알려진 랜스데일은 버지니아에서 정부의 상담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매파와 비둘기파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했다. 헤이그는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이렇게 합리화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도 역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고 들었습니다. 베트남은 동서 양 진영의 문제를 떠나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력을 동원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얻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시행하지 못했지만, 여러 가지 군사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기동성 확보와 국민들의 지원이 뒤따라야 했지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라크 클리퍼드의 주장은 정반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을 심사숙고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안보가 위태롭지 않다는 확신만 있었으면 군사 개입은 피했어야 했지요. 우리가 걱정했던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라는 우려는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옳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미노 이론 또한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슬레징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이다.
"베트남전을 전후하여 우리가 뽑았던 사람들은 전부 매파였다. 나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다. 옳은 말을 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정부 내에서 전쟁을 가장 반대했던 풀브라이트는 상원에서 탈락했으며, 반전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매카시는 정치적인 기반을 상실하여 버지니아농장으로 돌아가 다른 길을 걸었다. 시인으로써 새로운 명성을 얻었던 그의 詩에는 '키신저는 자신이 옹호한 전쟁의 종말을 스스로 조작했다고해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네. 그것이 훌륭한 외교라네!'라는 대목이 있다."
첫번째 미군으로써 호치민에게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던 베트남전의 산증인 패티는 플로리다에서 책을 쓰고 있었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당시 미국 정치계에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유치한 낙관주의가 팽배했다. 베트남은 이런 미국 정치 현장에서 점점 더 커져 가는 화농이었다.
미국의 이런 생각은 잘되어 봐야 스스로의 고립만을 자초할 것이다. "
1981년 참전용사협회에서 발행한 한 연구보고서는 참전용사의 70%가 대학원 과정에 등록했으나, 심리적인 장애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과정 전체를 마친 사람은 소수였다고 발표했다.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군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 협회 회원이 된 데이브 크리스천 예비역 대위는 참전용사들의 카운셀러로 일하면서 총체적인 화해의 장을 이렇게 역설했다.
"미국 안에 여전히 높은 장벽이 있다. 이것부터 뿌리뽑아야 한다.
베트남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많은 가정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이 옳다고 믿었던 것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바쳤기 때문이다.
모두의 명예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
켄터키 주 바드스타운(Bardstotwn)은 미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인구 5,800명이 사는 조그마한 도시이다. 4구의 시신이 돌아오던 날 딸을 낳은 지 5일밖에 되지 않은 한 젊은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딸도 아버지를 잃어버렸구요.
나의 상처는 다음의 문제였습니다."

이 책을 끝내면서 니의 생각은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조국의 해방에 모든 것을 바쳤던 호치미, 반 티엔 둥, 그리고 많은 북베트남의 지도자와 인민들, 그리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마틴 대사, 데이브 크리스천 대위, 즈느비에브 간호사....., 모두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著者 "마이클 매클리어"
자료편집: www.vietvet.co.kr